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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삶을 베낀다

아일린 마일스, 『낭비와 베끼기』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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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마일스라는 시인. 몰랐다.

1992년 부시와 클린턴이 맞붙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서 대통령이 된 클린턴과 재선에 실패한 부시 말고 로스 페로라는 제3의 후보가 꽤 많은 표를 얻었다는 것 정도는 알지만 아일린 마일스란 시인도 투표 용지에 이름을 올렸었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

그리고 아일린 마일스의 출마를 지지하며 인권운동가 조이 레너드가 쓴 <나는 이런 대통령을 원한다>라는 글이 회자된다는 것도 몰랐다.


무엇을 몰랐다는 것은 지금 부끄러운 일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알아야 하는 것을 몰랐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무엇을 아는 것이 부가적인 일이라면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다. 아일린 마일스에 관해서라면?


태평양 건너의 한 시인을, 양당제가 분명하게 정립된 국가의 대통령 선거에서 제3의 후보도 아닌 후보를, 그리고 그것을 응원하기 위해 쓴 글을 알아야 하는 것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일은 아닐 것 같다. 그런데 그러니까 나는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될까?


질문의 방향을 달리 할 필요가 있다.

퀴어임을 자처하는(그는 레즈비언 대신 퀴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시인이 무엇 때문에 당선될 가능성이 ‘0’인 선거에 나서고, 또 그런 무모한(?) 출마를 응원하는 글을 어찌 되었든 화제가 되는 상황을 몰랐다는 것은 정말 괜찮은 일일까? 혹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풍문으로나마 엿듣지 못한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관심 가져야 할 일에 대한 창을 꼭 닫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부끄러워 해야 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이 책 《낭비와 베끼기》는 그런 정치적인, 혹은 성소수자 운동에 관한 책이 아니다. 예일대학교에서 제정한 윈덤캠벨문학상(물론 나는 이 상에 대해서 모른다)의 시상식 기조연설을 단행본으로 펴낸 게 바로 이 책이다. 원제는 “당분간(For Now)”.


글쓰기에 관해서 이야기한다(기조연설을 글로 옮긴 것이니 ‘이야기한다’가 맞는 표현인데, 기조연설은 또 글을 말로 옮긴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에 대한 얘기도 없다. 또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게 무척 간접적이다. 뉴욕의 임차인으로써 집을 지키는 일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자료가 어디서 분실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그가 어떤 이인지 짐작은 할 수 있지만, 그게 글쓰기와 어떤 관련을 갖는지는 쉽게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결국은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다. 그에게 글쓰기는 삶이므로. 그의 삶은 그냥 글쓰기가 될 수밖에 없다. ‘검은색 일기장 한 권’이 생긴 이후로 “내가 시작”되고, 그것이 “내 공간”이 되었다고 하는 시인이다.


그는 문학이 낭비라고 한다. ‘완전히’ 시간 낭비라고 한다. 그리고 문학은 ‘베끼기’라고 한다. 그러나 삶을 베끼며, 시간을 낭비하는 문학이라고 하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 우리가 빡빡한 삶에서 숨을 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을 되새기도록 쓸 데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문학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비록 나 같은 사람은 이름도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필요없음의 유용함을 만들어가는 시인, 소설가들이 지금도 우리 곁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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