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 클뤼거의 『삶은 계속된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루트 클뤼거는 1988년 11월 9일 독일 괴팅겐에서 수정의 밤 기념강연을 해달라는 초대를 받는다. 그러나 그 강연은 이뤄지지 못했다. 11월 4일 연극 <돈 카를로스>를 보러 가는 도중에 무섭게 달려오는 자전거에 부딪혀 심하게 다친다. 그 강연은 1년 연기되었고, 1년 후 그날은 독일 역사에 큰 전환점이 된다. 바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루트 클뤼거는 그렇게 병상이 누워 있는 기간, 회상록을 쓰기 시작한다. 십대의 소녀로 세 군데의 강제 수용소를 거치고도 살아남은 그녀가 거의 60이 다 된 시점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산부인과 의사인 아버지와 부유한 공장장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 딸로 태어나(‘딸’로 태어났다는 사실, 그리고 그에 대한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반유대주의를 경험하면서 자라다 열 살을 갓 넘긴 1942년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수용소로 실려 가게 된다. 처음에는 체코의 테레지엔슈타트, 다음은 아우슈비츠, 그리고 친위대원에게 거짓말을 하며 가까스로 강제노동소인 그로스로젠수용소로 이송된다. 그리고 독일의 패배가 기정사실화된 이후 죽음의 행진 와중에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여 수용소에서 빠져나온다. 전쟁 후 독일에서 살던 어머니와 루트 클뤼거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미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도서관 사서로, 그리고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마치고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 캘리포니아대학 어바인캠퍼스의 독문학 교수를 지낸다. 이렇게 이 책(『삶은 계속된다』)에 적힌 그녀 삶의 궤적을 요약해보면, 이 책은 언뜻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유태인 소녀가 극적으로 살아남아 미국에서 성공하게 된, 성공담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절대 그게 아니다. 그녀는 단 한번도 성공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삶의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르는 과정이 중심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왔는지가 이 회고록의 중심이다. 그 후의 일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즉 자의식이 충만할 대로 충만해 있는 기록이다. 그녀는 기억에 의존하지만, 철저하게 현재 시점에서 기억에 남은 그때의 일들을 평가한다. 그러니까 무슨 일을 겪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고 그것이 그때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경험들이 자신을 어떻게 형성시켰으며, 그것들이 ‘현재’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 기록은 책 표지에 ‘어느 유대인 소녀의 홀로코스트 기억’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절대 그건 아니다. 소녀로서 그 일을 기억하는 것도 아니며,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그때를 기억할 수 있는 성인으로서 기억하고 있으며,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자신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자신을 완전히 객관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자신은 자신을 벗어날 수 없으며, 그 경험을 겪지 않은 자신도 상상할 수 없다.
이 기록에서 유대인에 대한 억압만이 유일하지 않다는 것은 이 책에서 아주 중요한 점이다. 그녀는 여성에 대한 억압 역시 상당히 중요한 억압으로 제시한다. 또한 어머니와의 불화도 거침없이 이야기한다. 그 지옥을 함께 헤치고 온 어머니와의 불화는 매우 뜻밖이다. 또한 홀로코스트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관, 박물관에도 매우 불쾌해 한다. 그것을 겪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에 대한 시선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다. 누가 알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얼마 전에 가해자 쪽에 있었으면서 자신은 가해자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어느 독일인의 삶』을 읽었다. 그때도 불편했지만, 그건 분명한 대상과 방향이 있는 불편함이었다. 지금의 불편함은 완전히 다르다. 반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슬픔도 아니고, 안타까움도 아니다. 그냥 불편하다. 그 불편함은 저자가 의도한 것이며, 불편하지 않다면 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는 것이다. 그게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