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웨더포드,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책의 서두 부분에서 잭 웨더포드는 몽골인(혹은 몽골제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몽골인은 과학기술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열지도 않았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지도 않았고, 책이나 연극도 거의 쓰지 않았으며, 세상에 새로운 작물이나 영농기술을 내놓지도 않았다. 몽골의 장인은 직물을 짜지도 못하고, 금속을 주조하지도 못하고, 도기를 만들지도 못하고, 심지어 빵을 굽지도 못했다. 그들은 자기나 도기를 제작하지도 않았고, 그림을 그리지도 않았고, 건물을 짓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군대는 여러 문화를 차례차례 정복하면서 이 모든 기술을 모아 이 문명에서 저 문명으로 전해주었다.
칭기스 칸이 세운 유일한 항구적 구조물은 다리였다.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던 그는 성, 요새, 도시, 성벽의 건설은 우습게 보았지만, 다리는 역사상 그 어느 통치자보다 많이 놓았을 것이다.“ (20쪽)
지금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던 몽골제국은 유적과 유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기록도 보잘 것 없다. 훌륭했던 고대 선조 덕으로 관광객들이 뿌리는 돈으로 먹고 사는 데가 어디 한두 군데인가? 그런데 몽골은 그렇지가 있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의 지배가 신기루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그리고 우리는 몽골제국이나 칭기스 칸을 설명하는 단어로, 주로 야만, 잔학 등과 같은 말을 많이 쓴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들에 대한 인상이다.
그러나 잭 웨더포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그들은 용맹했지만, 영리하게 전쟁을 치렀고, 배신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었지만, 종교나 타 민족의 문화에 대해서는 매우 너그러웠다. 상업을 중시했고, 그래서 안전한 교역로를 만드는 데 온 힘을 다했다. 남성들은 전투 기계와 같았지만, 여성들의 지위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보다도 높았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유산은 거의 남기지 못했지만, 그들의 영향은 그 어느 제국보다도 광범위했고, 본질적이었다(이 책의 우리 말 제목은, 몽골제국의 유럽에 대한 영향을 강조하고 있는데, 사실은 매우 부분적인 내용이다).
앞서 얘기한 대로 몽골인들은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칭기스 칸의 생애는 물론 그들의 세계 정복에 관해서 매우 제한적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몽골비사》라는 책이 해독되면서, 또 소련의 위성국가 시절 탄압당하던 칭기스 칸과 몽골제국 연구가 기지개를 펴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잭 웨더포드의 이 책은 《몽골비사》를 바탕으로 그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또 다른 1차, 2차 자료를 통해서 칭기스 칸과 몽골 제국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테무진, 즉 칭기스 칸의 등장에서 제국의 건설까지의 이야기다. 탈취당한 여인의 자식으로 태어나 노예 생활까지 하면서 끝내는 일어서는 테무진의 불굴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2부에서는 세계 정복에 나선 칭기스 칸에 대해서 쓰고 있다. 신출귀몰한 전술과 영리한 전투 부대 운영, 용맹한 정신 등이 연전 연승의 비책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이 칭기스 칸, 한 명이었다면 이 책은 여기까지로 끝을 맺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칭기스 칸 단독 주연이 아니다. 2부의 마지막은 칭기스 칸이 죽은 이후 ‘왕비들의 전쟁’을 다룬다. 칭기스 칸의 네 아들 중 우구데이가 칸으로 즉위하였고, 술에 빠져 살다 죽은 후 벌어진 섭정의 시기다. 이 시기의 일들과 그 이후의 일들은 당시 몽골제국에서 여성들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하기도 했던 것이다. 역사에 이 싸움에서 승자는 칭기스 칸의 넷째 아들 툴루이의 셋째 아들 쿠빌라이가 되지만, 진정한 승자는 툴루이의 아내 소르칵타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녀는 우구데이가 죽고 그의 아들 구육이 칸으로 즉위하기까지 우구데이의 아내 투레게네가 실권을 잡았던 시기에 몸을 낮추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아들들을 보호하고 영지를 다스리며 기회를 엿보다 결국은 큰 아들 뭉케가 칸으로 즉위하도록 한다. 뭉케 칸이라는 인물도 상당히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결국은 가장 전투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중국 문화에 많이 빠져들었던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에 오르고, 또 원이라는 나라를 만들게 됨으로써 중국 역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3부는 바로 이 쿠빌라이의 통치에 관한 얘기와 몽골제국의 세계사에 대한 영향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잭 웨더퍼드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칭기스 칸과 몽골제국에 대해 사뭇 다른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몽골에 대한 편견은 몽골제국 당대의 것이 아니라 근대 이후의 것이라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당대에는 오히려 칭기스 칸과 몽골제국에 대해 긍정적이고, 위대하다는 이미지가 훨씬 우세했었다. 이는 《켄터베리 이야기》로 영문학의 효시가 된 제프리 초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고귀한 왕의 이름은 칭기스칸이었으니
그는 당대에 큰 명성을 떨쳐
어느 지역 어느 곳에도
만사에 그렇게 뛰어난 군주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