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일체의 기억을 잃어버린 사내. 그는 탐정 사무소에서 8년을 일하고, 탐정 사무소가 문을 닫자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간신히 입수한 사진 한 장과 부고(訃告)를 단서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실타래처럼 사람들이 연결되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조금씩 드러난다. 뿌연 안개 속을 허우적대는 것만 같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추적은 조금씩 안개가 걷히고, 결국은 과거 어느 시점에서 퍼즐이 맞춰진다. 그러나 그 기억은 정확한 것일까? 작가는 분명하게 대답하지 않는다(마지막 기억 이후 십 년의 기억은, 소설에서도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기억은 한 인간에게 있어 정체성의 본질이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자신의 사회적 의미, 가치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어떠한 관계도 없다. 그래서 기억을 잃어버린 이가 기억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는 문학에서 아주 자주 등장한다. 기억이 편집되는 것이라는 식의 전개도 흔하다. 그만큼 기억은 개인에게, 사회에게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이며, 그것을 회복하는 이야기는 과거를 향하지만, 동시에 미래를 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사내(기 롤랑이라 불리기도 하고, 페드로라 불리기도 하는)가 과거를 악착 같이 추적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의 추적이 완벽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예상할 수 있다. 그건 사람의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측면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억과 관련된 과거는 분명 현재와 연결되지만, 그 연결은 불완전하다. 어떤 것은 끈적거릴 정도로 밀착되어 있지만, 또 어떤 것은 도무지 그 관련성을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기억은 선별적이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과거를 짜맞춰가는, 기억을 잃어버린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은 현재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을 관통해온 세대인 자신의 현대는 과거를 잃어버림으로써 가능했다고, 그렇게 끈질기게 구성하려 하더라도 끝내 구성하지 못하는 시간이 있음을. 그래서 현대가 가능해졌다고. 과거의 소멸을 통해 현대가 가능할 수 있음을, 그는 보여준다. 그건 사실, 어느 세대에나 해당한다. 모두 자신들의 세대가 불행하다 여긴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