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낯설음'에 대해 생각하기

서동수, 《언캐니한 것들의 목소리》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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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캐니(uncanny)'를 일반적으로 '낯익은 대상에서 낯설음을 느꼈을 때의 섬뜩한 감정'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낯설은 낯익음'이란 얘기고, 그건 반대로 ‘낯익은 낯설음'도 될 것이다. 어려운 외국어를 동원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보고 여기던 것은 새로운 시각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한 사물, 현상,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았을 때, 깊게 사유했을 때 익숙하던 것이 낯설어지고, 낯설었던 것이 낯익어지는 것. 그래서 그랬을 때 세상의 진실이 좀 더 드러나는 것. 서동수는 그런 의미로 이 '언캐니'를 이야기하고 있다.


네 편의 글을 통해 서동수가 언캐니한 것들, 즉 이야기 소재로 삼은 것은 히어로와 빌런, 좀비, 신, 그리고 재난 속 일본인이다. 이것들이 하나로 엮인다는 것 자체가 낯선 일이다. 물론 서동수는 이것들을 동일한 특성을 갖는, 어떤 범주로 묶는 것은 아니다. 대신 그것들을 응시할 때 낯설어지면서 현대 사회에서의 의미가 희미해지고, 그것이 어쩌면 진실일지 모른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우리에게 낯익은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또한 그것들이 그 낮익음 뒤에 어떤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음 역시 공통적이라는 얘기다(다른 것들도 많은데 굳이 왜 이런 소재를 이야기의 소재로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마나 한 얘기다).


이 언캐니한 것들의 목소리를 듣는 방식은 영화다. 모두 영화를 매개를 이것들을 들여다본다. 왜 영화일까? 영화는 설명적이지 않다. 대신 보여주고 그것의 의미를 들여다보도록 한다. 영화 감독이나 배우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이 당대의 어떤 시선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대의 모습을 반영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신의 문제를 다룬 글에서 <거룩한 소녀 마리아>나 <퍼스트 리폼드> 같은 영화가 의도적인 문제 제기인 것으로 보인다면, 좀비를 다룬 글에 등장하는 영화들은 아마도 여기의 저자가 그 영화를 그렇게 봐서 그렇지, 영화를 만든 사람은 딱히 그런 의도를 가지고 만들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영화를 통해 무엇을 볼 것인가는 영화를 만든 사람이 정하는 게 아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이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책보다도 더 직관적으로 이뤄진다.


저자의 분석과 생각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좀 과하게 해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도 있다. 물론 격하게 동의하게 되는 부분도 많다. 그런데 그런 동의 자체가 이 책의 목적은 아니라고 본다. 동의하던, 그렇지 않던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는 것이 저자가 내미는 손이 아닐까? 한 대상에 대해, 한 현상에 대해 차분히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생각하는 게 점점 드물어져 가는 숏폼의 시대에 그런 것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동의하든, 반대하든 합께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이 작은 책의 글들이 의미가 있다.


저자는 '언캐니'라고 쓰고는 괄호 속에 '기괴한 것들'이라고 덧붙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여기의 대상들이 원래부터 기괴한 것들은 아니다. 그것들이 기괴해진 것은 그것들을 늘 그런 것이라고 여기고, 더 이상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괴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 자체가 기괴한 것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한 꺼풀 벗겨 가며 깊이 생각할 때 그것들은 언캐니함에서 벗어날 것이다. 우리는 속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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