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클라스, 《어떤 일은 그냥 벌어진다》
1945년 미국 육군장관 스팀슨은 원자폭탄 투여 후보지에서 교토를 극구 반대했다. 19년 전 아내와 함께 방문했던 교토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해서였다. 그렇게 첫 원자폭탄은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그리고 히로시마 다음으로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가사키는 원래 후보지였던 고쿠라의 기상 상태 때문에 차선책으로 선택된 곳이었다. 한 부부의 휴가 여행과 잠시 드리웠던 구름이 교토와 고쿠라를 구했다. 대신 다른 도시의 주민들을 몰살당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는 데 어떤 이유도 알지 못했고, 반드시 죽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는 영국의 노팅엄셔 웰벡 수도원에서 포틀랜드 공작과 사냥을 나섰다 엽총 오발 사고로 죽을 뻔했다. 겨우 살아난 그는 몇 달 후 사라예보로 여행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몇 차례의 우연이 겹친 끝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야 만다. 만약 페르디난도 대공이 영국의 사냥터에서 목숨을 잃었다면 제1차 세계대전은 과연 일어났을까? 또는 결국엔 전쟁이 일어났더라도 같은 형태였을까?
조지프 로트는 휴가 중에 동료인 모네의 <라바쿠르의 일몰>이 그려진 넥타이가 동료인 일레인 그린버그에게 어울릴 듯해서 구입했다. 그린버그는 학술 발표 직전 넥타이를 선물 받고, 그것을 메기 위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 15분 사이에 알카에다의 테러리스트들이 탄 비행기는 세계무역센터를 들이받았고, 그린버그는 목숨을 건졌으나 106층 회의장으로 올라간 로트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들이 그런 운명을 맞아야 할 필연적 이유는 없었다.
이런 예들이 한 가득이다. 남북전쟁에서 한 병사가 우연히 발견한 남부군의 지령(‘버려진 담배 세 개비’)과 지령에 쓰인 서명을 알아차린 장교 등의 우연으로 전쟁의 향방이 바뀌기 시작했다든가, 저자의 증조부의 아내가 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도 죽임으로써 증조부가 재혼해서 비로소 저자가 태어날 수 있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을 포함해서, 진화적 우연과 사회적 현상의 우연 등등.
이런 예들은 “모든 일에 다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저자의 관찰, 혹은 통찰을 입증하기 위해 동원된 것들이다.
우리는 모든 것에 이유를 찾으려 한다. 어떻게든 인과 관계를 찾으려 하고, 세계가 정돈되어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우리 삶과 사회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우리 손 밖에 노는 세상을 우리는 못견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착각한다. 실제로는 대부분의 일은 우리의 통제 밖에 있으며,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잘 모르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필연적 이유는 없다. 세계는 임의적이며, 결정론적이다.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이러한 주장에 의해 상당히 복잡한 논리를 통해 ‘자유의지’를 부정한다. 사실 그 논리를 가까스로 따라갈 수는 있는데, 그리고 그런 논리가 그가 설득하고 있는 세계의 임의성, 결정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도 알겠는데, 정작 그 결론이 자유의지에 대해서만큼은 선뜻 동의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오늘 브라이언 클라스의 책을 읽는 게 나의 의지가 아니라 137년 우주의 탄생 때부터 예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라는 존재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 건지 솔직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물론 저자는 그런 자유의지를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이 황폐화되고 사회가 무법적이 될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실제로 개인의 노력과 자세를 다시 강조하고는 있다(실은 이게 약간 아연하기는 하다).
자유의지에 관한 부분에 이르기 전까지 다양한 예들의 흥미로움과 그 예들을 통한 세계 이해의 분방함은 매력적이다. 그런데... 번역이... 특히 뒤로 갈수록 집중도가 떨어졌는지, 아니면 저자의 철학적, 혹은 말돌리기 식의 글쓰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번역에 의심이 간다. 꽤 재미있고, 얻을 것도 적지 않은 책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