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왜 그랬는지 분명한 이유는 댈 수 없지만, 분명 읽었을 것 같은데 정작 곰곰 따지고 보면 한 권도 읽지 않은 작가가 종종 있다. 내게는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그런 작가 중 하나다. 그토록 유명한 작가이니만큼 그의 대표적 작품은 제목은 물론 내용도 대충은 알고 있는데 (조금은 창피하게도) 한 권도 읽은 적이 없다. 출처가 불분명하고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헤밍웨이가 썼다는(?) 여섯 단어짜리 소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팝니다: 아기 신발. 사용한 적 없음)”을 제외하고는 정말 그렇다.
얼마 전 도서관 서가를 오가다 웬일인지 헤밍웨이 작품들이 눈에 띄었는데, 문득 내가 지금까지 헤밍웨이의 작품을 하나도 읽지 않았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읽기로 했다. 우선은 짧은 《노인과 바다》부터.
100쪽 남짓에 불과한, 장편소설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짧은 이 소설이 헤밍웨이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소설이다. 꽤 오랫동안 쿠바에 머물기도 했던 헤밍웨이는 이 소설에서 드넓은 멕시코만을 배경으로 한 늙은 어부가 거대한 청새치와 상어 떼와 벌이는 각고의 투쟁을 그렸다.
줄거리라고 하면, 84일 동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늙은 어부가 홀로 바다에 나가 자신의 배보다도 큰 청새치를 잡았지만, 결국엔 상어 떼에게 다 뺏기고 앙상한 뼈만 가지고 항구로 돌아온다는 내용이 전부다.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자신을 따르던 소년 마눌린마저도 부모의 강요로 다른 배를 타게 되어 홀로 고기잡이에 나선다. 먼바다에 이르고서야 한 마리의 물고기가 미끼를 무는데, 놀랍게도 자신의 배보다도 더 큰 청새치였다. 미끼를 문 후 배를 끌고 다니던 청새치가 물속 깊은 데서 비로소 물 밖으로 나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은 장관이며, 산티아고의 탄성을 자아낸다.
“낚시줄은 서서히 올라오더니 배 앞쪽 수면이 부풀어 오르면서 마침내 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쉬지 않고 계속 올라오자 고기 주위에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 햇볕을 받은 고기는 번쩍번쩍 빛이 났고, 짙은 자줏빛의 머리와 등, 옆구리의 연보랏빛 줄무늬가 햇살에 드러났다. 주둥이는 야구 방망이만큼 길죽하고 결투용 쌍날칼처럼 끝으로 갈수록 뾰족해졌다. 고기는 다이빙 선수처럼 온몸을 물 위에 드러냈다가 유연하게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커다란 청새치에 이틀이나 끌려다니면서도 버티고 버틴 노인은 결국 청새치를 잡아 죽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만족스럽게 항구로 돌아오는 길에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의 공격을 받는다. 공격하는 상어를 다섯 마리나 죽이면서 물리치지만, 결국엔 물고기의 모든 살을 빼앗기고 만다. 그 위풍당당했던 청새치의 모습은 이렇게 바뀌어 버리고 만다.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가로등 불빛에 고기의 커다란 꼬리가 조각배의 고물 뒤쪽에 꼿꼿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허옇게 드러난 등뼈의 선과 뾰족한 주둥이가 달린 시커먼 머리통, 그리고 그 사이가 모조리 앙상하게 텅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단순한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힘이 있다. 한 가지 이야기에 집중해서 인간의 도전과 좌절을, 그리고 무너질 수 없는 인간성을 집요하게 그려낸 이 소설은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다.
헤밍웨이 출판사 사장 찰스 스크리브니에게 보낸 편지에 “쉽고도 단순하게 읽힐 수 있고 길이가 짧은 것 같지만 가시적 세계와 인간 영혼 세계의 모든 차원을 담고 있습니다.”라고 썼다고 한 걸 보면, 그 역시 이 소설을 쓰고는 무척이나 만족했는지를 알 수 있다.
헤밍웨이는 늙은 어부 산티아고의 말을 빌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고 하면서 삶은 투쟁과도 같지만, 그 투쟁 같은 삶에서, 물리적으로는 좌절당할 수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절대 굴하지 않는 굳건한 인간상을 그려내고, 삶에 대해 긍정한다. 자연 앞에서의 겸손과 함께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쉽게 공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함께 그려낸 것이다.
그런데... 헤밍웨이는 이런 소설을 써놓고는 왜 자살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