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골딩, 《파리대왕》
내가 노벨문학상이란 걸 처음으로 인식한 해는 1983년이었다. 그해 영국의 윌리엄 골딩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그의 대표작은 1954년의 작품 《파리대왕》이라고 했다. ‘파리대왕’? 당시에는 이상야릇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읽지는 못했다. 내용은 대충 들어 알게 되었지만 정작 이후로도 읽지 못했다.
그로부터 40년도 더 지나 읽게 되었다.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을 모아놓은 도서관의 서가를 훑다 그 40여 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고, 꺼내 들었다.
영국 소년들을 싣고 가던 비행기가 무인도에 추락하고, 살아남은 소년들이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소설 안에서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지만, 소설의 배경에는 핵전쟁이 있고, 한 무리의 영국 소년들을 안전한 장소로 후송하던 비행기가 요격을 받고 추락하면서 태평양에 있는 무인도로 불시착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나름의 지도자를 세우고, 규칙을 만들고, 구조를 위해 불을 피우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오래가지 못한다. 소년들 사이에 대립이 생기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파리대왕》은 기본적으로 문명과 야만을 대비시킨 우화(寓話)라고 한다. 인물들이 바로 그런 문명과 야만을 상징하고 있고, 사회의 여러 성격의 인물을 내세우고 있다.
우선 랠프가 있다. 그는 문명의 가치를 대표한다. 지도자적 자질을 지니고 있으나 권력을 유지하고 악을 물리칠 만큼의 냉혹함은 없다. 어쩌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군주 자질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야만, 즉 어둠을 상징하는 잭이란 소년이 있다. 그는 거칠고, 힘이 있으며, 파렴치하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모으고, 상대편을 굴복시키는 지도력을 발휘한다. 그는 야만을 상징하지만, 그의 모습은 야만을 분명 문명사회에서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그 야만은 “사냥과 술책과 신나는 흥겨움과 솜씨의 멋있는 세계”로 치장하고 있고, 반면 문명은 “동경과 좌절된 상식의 세계”로 묘사된다.
지식인 유형의 ‘돼지(피기)’가 있다. 그는 육체적으로 약점을 지니고 있고, 그 때문에 놀림을 받는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대안을 내세울 줄 안다. 그러나 그는 처절하게 좌절한다. 골딩은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의 운명을 그렇게 봤던 것이다.
사이먼은 순교자가 된다. ‘파리대왕’을 유일하게 인식하고, (환각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인물이다(“사이먼의 전면에는 ‘파리대왕’이 막대기에 매달려 씽끗거리고 있었다.” “사이먼은 자기가 거대한 아가리를 들여다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 속은 새까맸다. 점점 퍼져가는 암흑이었다.”). 진실(무시무시한 짐승이 시체라는 것)을 알리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집단적으로 살인을 당하고 만다. 순교자의 운명이다.
잔혹한 행동대장 로저도 있고, 문명의 편에 서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야만에 끌려가고 마는 쌍둥이 형제를 비롯한 많은 소년들도 있다.
《파리대왕》에서의 인물들의 묘사와 구성은 문명의 허약함과 리더십의 붕괴를 그려내고 있다. 문명에서 성장한 소년들이고, 보호받던 이들이지만, 파괴를 향한 집착과 어두운 인간 본성을 그대로 노출하고 만다.
그리고 ‘파리대왕’. 파리가 꾀는, 죽은 암퇘지 머리가 바로 파리대왕이다. 이 파리대왕은 악마다. 파리대왕은 부패, 타락, 잔인함, 속임수, 공포 등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파리대왕을 불러온 것은 바로 잭을 비롯한 사냥부대, 즉 인간이다. 윌리엄 골딩이 소설에서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는 이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소년들은, 쫓기던 랠프의 마지막 순간에 구조된다. 그러나 소년들을 구조한 순양함과 장교들은, 그럼 전적으로 문명의 편인가? 윌리엄 골딩은 바로 그들이 “무자비한 방법으로 적을 사냥질할 것”이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문명에 대한 강력한 경고, 이것이 《파리대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