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페트로스키, 《연필》
연필. 이 단순해 보이는 필기구에 대한 얘기가 거의 600쪽에 이른다. 생각해봤다. 내가 연필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무엇인지. 오랫동안 써왔으므로 많은 걸 알고 있겠지 싶지만 사실 별로 없다. 특히 어떻게 만드는지에 관해서는 더욱더. 연필심을 흑연으로 만든다는데, 순수한 흑연을 쓰는 것인지, 그 흑연 덩어리를 어떻게 가는 원통형으로 만드는지 몰랐다. 가늘게 만든 연필심을 어떻게 나무 속으로 집어 넣는지, 그것도 아주 중앙에 정확하게 집어 넣는지 몰랐다. 연필의 나무는 어떤 나무를 쓰는지도 몰랐다. (간단하게 정답을 말하자면, 순수한 흑연을 쓰지 않는다. 콩테가 개발한 방법인 점토와 섞고, 용광로에서 가열해서 연필심을 만든다. 만든 연필심은 주로 삼나무로 만든 판에 홈을 내고 그 홈에 넣은 후 나머지 판을 덮고 아교 등으로 붙인다. 물론 이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헨리 페트로스키는 연필이라는 간단한 인공물의 역사를 통해서 공학을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공학이란 단순한 응용과학이 아니라 기술과 과학이 만나는 지점이다. 공학으로서 연필은 단순한 이론으로만 존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험만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이 아니다. 또한 한번 만들어지면 영원히 존재하는 물건도 아니다. 끊임없이 개선이 요구되는 상품이다. 가장 작고 사소한 도구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공학의 기본적인 사항을 모두 체현하고 있는 인공물이다.
그래서 헨리 페트로스키가 쓰는 연필의 역사는 연필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한 흥미 위주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넘어선다. 물론 연필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떤 역사를 거쳐서 지금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해서 쓰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역사 추적이 매우 힘들다는 것도 토로한다. 사람들은 많은 것들에 대해 기록을 남겼지만, 그 기록을 남기는 연필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실하게 남겼던 것이다. 헨리 페트로스키는 그런 부실한 기록들을 겨우겨우 짜맞추며 연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런 연필을 공학적 발명품으로써, 공학의 개념과 발전을 체현할 수 있는 상징물로써 보고 있다. 그래서 그가 굉장히 주목하고 있는 것은 연필을 만드는 공정에 관한 것이며, 또 그 공정의 개선에 관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내 앞의 연필이 어떻게 내 앞으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별로 질문하지 않는다. 이제는 어떤 제품인지에 대해서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연필에 관한 복잡한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런 복잡한 역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연필을 쓸 기회가 별로 없는 시대이기도 하다. 또 너무 흔하기도 하다. 연필을 쓸 때도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연필 중 이것 썼다, 저것 썼다 하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하찮은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필의 역사는 하찮지 않다. 많은 기술이 필요했던 놀라운 발명품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발명과 개선에 기여했던 도구다. 이제 그 연필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