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욱, 《이름들의 인문학》
의사 박지욱의 전작 《역사 책에는 없는 20가지 의학 이야기》를 읽고 이에 대해 쓰면서 여유로움을 느꼈다고 했다(http://blog.yes24.com/document/9353561). 의학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어떤 긴장감을 갖게 되는 게 아니라 여유롭게 산책하면서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한 마디로 참 좋았다. 사실 《이름들의 인문학》을 골라 책장 옆에 올려두면서는 이 책의 저자가 《역사 책에는 없는 20가지 의학 이야기》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본격적으로 읽기 위해 저자 약력을 보는 순간 기대감이 막 피어올랐다.
《이름들의 인문학》은 어떤 면에서는 범위를 좁혔고, 또 어떤 면에서는 범위를 넓혔다. 이름, 명칭에 관한 이야기들로 범위를 좁혔고, 의학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의 이야기까지 넓혔다. 이름 혹은 명칭은 단지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부르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불리는 이유가 있으며, 그렇게 불리면서 그 의미가 전달된다. 박지욱은 역사성을 지닌 이름들을 추적하며 그것들의 현재성을 음미한다.
그래도 중심은 의학 용어다. 제왕절개라든가, 마이신, 우두법, 서번트 증후군, 레이오넬라균과 같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용어도 있고, 골상학, 머큐로크롬, 무통분만, 오피오이드, 쿠싱증후군, 티아민과 같이 들어는 봤어도 어디서 온 용어인지는 몰랐던(혹은 굳이 신경쓰지 않았던) 것들도 있다. 석면이나 프로테우스 같은 것은 더욱 그렇다. 1부에서는 그런 의학과 관련된 용어를 다루었다면 2부에서는 이동에 관한 용어들(점보나 콩코드와 같은 여객기의 이름, 드론, 공항과 같은 너무 익숙한 용어들), 지리와 관련된 것들(적도, 아메리카 대륙, 유로파, 오리엔트, 산티아고 순례길 등 ? 근데 왜 인슐린을 여기에 넣었을까?), 그리고 가스나 석유 등과 같은 용어의 기원을 찾는다. 그리고 3부에서는 지구가 아니라 저 우주로 나아간다. 지구와 함께 태양을 돌고 있는 행성들의 이름, 그 행성들의 주위를 돌고 있는 위성들 등등의 이름들이다.
단순히 이 이름들을 알고, 그 이름들이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모든 것은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니. 하지만 그 이름과 관련한, 혹은 그 이름이 붙은 것들, 상황들의 주변 상황들에 대한 설명은 이 책이 왜 ‘인문학’인지를 알게 한다. 단편적 지식이 확장되고 깊어지는 모양새다. 인류가 쌓아온 것은 어마어마한 지식인데, 그 지식이 언제나 이름에서부터 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은 이름을 고른 통일성이나 규칙성 같은 것을 별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행성과 위성 이름을 제외하고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한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름을 고른 것 같지도 않고.
그래도 즐겁고, 다채롭고, 매우 유익한 여행을 선사하는 것만큼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