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 《불타는 작품》
윤고은의 단편 <불타는 작품>은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에 수록되어 있다.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를 읽고 쓴 독후감에 밝힌 대로(https://blog.naver.com/kwansooko/223328934181) 장편 《불타는 작품》을 읽기 위해 검색하다 같은 제목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소설집을 읽게 되었더랬다. 그땐 바로 장편을 읽어야지, 했는데 그게 거의 2년이 되어 버렸다. 이제 읽었다.
장편 《불타는 작품》은 단편 <불타는 작품>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단순히 길이만 늘인 작품은 아니다. <불타는 작품> 말고도 다른 단편의 모티브들을 따와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단편에 상황적인 강렬함이 있다면, 장편에는 그 과정까지 이르는 많은 모순과 갈등, 그리고 사유를 담고 있다.
몇 가지 비상식적인 설정이 있다.
‘백만장자 개가 예술가를 후원한다.’
‘후원받아 제작한 작품 중 하나를 불태워버린다.’
이런 설정 속에 호구지책으로 배달 일을 하는 화가 안이지가 있다.
소설가 윤고은이 이러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설정과 그 속에 놓인 예술가를 통해 과연 무엇을 얘기하려고 했는지는 여러 가지로 짐작할 수 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예를 들어 예술이란 결과인가 창작의 과정인가?
현대의 예술에서 원본의 의미는 무엇인가?
자본에 의지해야만 하는 현대, 아니 원래부터의 예술의 숙명?
자신의 작품을 불태워서라도 유명해져야만 하는가, 하는 갈등
또는 자신 삶의 이유를 납득시키기 위해 진실을 왜곡해도 되는지의 문제
등등
이런 것들 가운데 과연 무엇이 소설가가 가장 중심에 두고 고민했는지는 모른다.
사실 굳이 알 이유는 없다.
독자는 나름의 이유로 소설을 읽고,
나름의 주제를 파악하고, 또 공감하거나, 아니면 외면한다.
그렇다면 내가 가장 공감한 것, 아니 가장 고민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화가 안이지의 상황에 놓였을 때 나를 스스로 납득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개의 후원을 받아 최상의 조건에서 작품을 제작하고, 그것으로 유명해진다? 예술가로서의 자존심 같은 게 없을 수 있을까? 이건 아니다, 하고 뛰쳐나올 수는 없을까? 하는 것들.
그런 상황에 나를 대입해 봤다. 여러 결론이 나왔지만, 결론은 점점 그걸 받아들이는 쪽으로 우세해져갔다. 예술가로서의 성공과 생활인으로서의 삶 모두가 이것으로도 해결될 수 있는데, 과연 거부할 수 있을까? 거부하고 뛰쳐나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예술가, 궁핍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소설 속 화가 안이지의 곤란한 상황은 사실, 예술가만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맞부딪히는 수많은 선택을 패러디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