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료에서 과잉 진단은 무엇이 문제인가

수잰 오설리번, 《진단의 시대》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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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좀 의아했다. 책을 집어들 땐 몰랐는데, 저자(수잰 오설리번)의 약력을 다시 확인해보니 낯이 익은 책 제목이 눈에 띈다. 《잠자는 숲속의 소녀들》. 불가사의한 질병들에 대한 책이었고, 신경과 전문의다. 그런 그녀가 진단에 대해서?


그런데 《잠자는 숲속의 소녀들》에 대해 내가 쓴 독후감을 다시 읽어보니 납득이 갔다. 거기서는 심인성 질환이라고 했고, 여기서는 정신신체 질환이라고 하는 질병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내가 아프다는 인식, 혹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이(실제로는 정상 범위에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질병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https://blog.naver.com/kwansooko/222934121998). 그때부터 진단의 문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범위를 넓혔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당혹스러웠다. 진단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했을 때 과잉진단의 문제를 얘기할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갔지만, 그게 우리가(적어도 내가) 가진 보편적인 상식에서 이처럼 벗어날 줄은 몰랐다. 단지 필요 없는 의료비 지출을 가져오는 것을 넘어서서 환자에게도 득보다 실이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으니 말이다.


현대 의료에서 진단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지적한다고 알고 있었다. 한 가지는 진단이 이뤄지더라도 치료법이 없는 경우, 또 한 가지는 기준값을 변경함으로써 환자를 양산하는 경우. 수잰 오설리번이 지적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헌팅턴병이 전자의 경우고, 자폐증이나 ADHD와 같은 것은 대체로 후자의 경우다. 여기서는 깊게 다루지 않지만 치매는 전자의 경우이고, 당뇨병이나 고혈의 경우는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진단이 정확하더라도 치료법이 없는 경우는 과연 그런 진단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에 대해, 특히 가혹한 운명에 대해 아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경우는 사실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고, 현대 의학 자체의 커다란 문제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기준을 낮춤으로써 환자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다른 문제다. 자폐증이나 ADHD가 늘어가는 현상을 두고서 실제 환자가 늘어났다는 견해도 있지만, 저자는 과거에는 병명이 붙지 않았던 경증의 증상에도 병명을 붙이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경증 질환의 경우에는 실제로는 거의 아무런 문제가 없이 살아갈 수 있는데도, 질병명이 붙음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의식하고,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여기에 들어가는 의료비를 비롯한 사회적 자본은 다른 데 쓰인다면 더욱 효과가 높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점도 지적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질병에 대한 대처에 대해서 오히려 경증 질환자의 목소리가 훨씬 많이 반영되는 것도 문제라고 본다.


이와 함께 흔히 지적하지 않는 진단의 문제로 만성 라임병과 롱코비드의 예를 들어, 환자 주도의 운동으로 등장한 질병의 문제도 언급한다. 롱코비드와 같은 질병에 관해서 저자는 이에 관한 검사가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의학적 진단은 주관적인 기술에 의존할 때가 많으며, 실수라든가, 욕심, 사회적 압력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과연 이 병은 존재하는 것인가?


여기에 암유전자 진단이 포함된 것은 의외였다. 우리는 조기 암 진단을 통해 많은 목숨을 구하고 있고, 구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저자는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고 본다. 유방암에 관한 유전자 검사를 통해 암 발생 확률이 높다는 것만으로 수술을 하는 것이 얼마나 옳은 결정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물론 그것으로 암 발생을 줄일 수 있는 것은 맞지만, 불필요한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사실 특히 이 부분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만약 나나 내 주변에서 이런 경우를 맞닥뜨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해서는 거의 분명하다).


산전에 태아에 대한 유전질환 검사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견해다. 이를 자식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예측하는 진단을 하고 유전적으로 완벽한 아기를 고르는 행위라고 보고 있으며, 이것이 정말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인지를 묻는다. 그러나 여전히 헷갈리는 것은 과연 나의 아내가 우리 아이를 가졌을 때 다운증후군 소견이 85%라고 했을 때 어떻게 했을 것인가? 라고 자문했을 때 여전히 나는 보편적인 선택을 했을 것이란 점이다.


이렇게 볼 때 나는 저자가 다소 도발적인 시도를 한다고 본다. 물론 저자는 의학이, 의사가 가져야 할 본연의 모습과 책임을 강조한다. 옳다고 본다. 그리고 저자가 문제를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논의를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잉 진단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분명히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게 나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지 분명히 대답할 수 없는 아이러니가 있다(문제는 두려움이며, 저자가 말한 대로 ”두려움의 해독제는 지식, 신뢰, 지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래서 저자가 만난 많은 환자들이 그렇게 신뢰할 수 없는 진단명을 받아들었을 때, 치료법이 거의 없음에도 만족스러워했던 것이 아닐까?

저자는 쉽지 않은 문제를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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