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한별,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번역은 탑이고, 배신이고, 교환이고, 광기이자 광기의 치료제이고, 길들이기이자 낯설게 하기이고, 조각보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자 사라지지 않는 흔적이고, 빵이자 결핍이고, 틈새이고, 메아리이고, 거울이고, 다시 탑이다. 비유를 통하지 않고는 정의할 수 없는 번역은 흰 고래이다.” (246쪽)
번역을 의식할 때가 있다. 번역가 홍한별은 “번역가가 호명될 때는, 투명한 무존재로 취급되지 않을 때는 책이 마음에 안 들 때뿐이다.”라고 다소 처량한 듯이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았다(물론 투덜거리는 경우도 있지만). 어떻게 이렇게 번역을 잘 했을까?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다. 원래 글도 이렇게 단아하고, 명료했을까? 이렇게 아름다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옮긴이를 확인하고 기억해두기도 한다. 아주 오래된 기억으로는 후쿠오카 신이치의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고, 최근에는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읽을 때 그랬다. 그때 이름을 기억했었다. 홍한별.
그 이름이 다시 들려온 것은 연말 심심찮게 들여다본 북튜버들의 잔치(?) 때였다. 의무인 것처럼 ‘올해의 책’ 비스무리하게 선정해서 발표하는데, 거의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책이 바로 《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였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는데, 북튜버가 들고 보여주는 표지부터 매력적이었다(번역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그게 불명료함에서 명료함으로 나아가는 은유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게 완벽히 명료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목도 범상찮았다. ‘흼’이라는 단어를 본 적이 있나 싶었고, ‘흰 고래의 흼’(흰 고래는 흰 건 당연한 거 아닌가?)이라는 당연한 말이 무언가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고 짐작했다.
그리고 읽었다.
맞다. 번역에 관한 글 묶음이다. 각각의 글 꼭지는 독립적인 글이기도 하지만, 연결되어 있다. 앞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는 따로 읽어도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펄쩍 뛰어서 다른 얘기를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어 읽었을 때 더욱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공감할 수 있다. 말하자면 무심한 듯 세심하게 연결 고리를 만들어 글을 썼다.
번역가의 자의식이 짙게 배어 있다. 번역은 ‘흰 고래의 흼’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들어야 하는 임무를 지니지만, 독자들이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때에야(투명할 때에야) 좋은 번역이라고 한다는 인식이 그렇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듯 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번역가라는 자의식은, 책의 모든 글을 자신이 썼음에도 그의 글이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드러난다. 번역가는 어떻게 인정받는 것일까?
그런 자의식과 관련이 없는 듯, 관련이 있는 논쟁이 바로 직역과 의역 논쟁이다. 직역(혹은 축어역, 이를 ‘낯설게 하기(foreignizaton)’라고도 한단다)과 의역(혹은 의미역, 이를 ‘길들이기(domestication)’라고도 한단다) 사이의 논쟁은 번역에 관한 가장 치열하면서도 결론이 나질 않은 논쟁이다. 홍한별은 이를 비교하면서 어떤 것이 옳다는 것을 소리높여 주장하지는 않지만, 자꾸자꾸 의역, 의미역 쪽으로 쏠린다. 어차피 우리는 18세기의 영국 사회의 언어를 현대의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인 아닌가?(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번역가는 자신과 동시대 독자를 염두에 두고 독자가 원래 작품이 쓰인 시대의 독자들처럼 작품을 즐길 수 있게끔 새로이 번역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 혹은 그 정도의 차이를 갖고 있는 번역가들이 있다. 그들이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번역가 홍한별이 번역을 대하는 자세가 그렇다는 것이다(나로 말하면, 책의 종류에 따라 직역과 의역의 정도가 달라져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사실 이 책에서 홍한별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또 하나는 번역가의 자존심, 혹은 자부심이다. 사실은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게 기계번역의 침공에 대한 번역가의 대응이기 때문이다. 그는 “기계 번역은 단어에서 단어로, 몸에서 바로 몸으로 이동한다. 그 사이에는 어떤 생각도 의미도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번역가의 존속을 강력하게 믿는다. 그것은 사실 축어역과 의미역 사이에서 의미역(의역)의 손을 들어줄 때부터 짐작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기계 번역의 시대(여기서 ‘시대’라는 것은 대세가 되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에 인간 번역가가 어떤 존재 조건 속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번역을 해야 할 지에 대해서 깊은 고민이 묻어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더불어 드는 생각은 그런 대단한 걸 요구하면서 번역료는 왜 그런가, 하는 반발심이 들기도 한다.
책을 보면, 우리나라 발간 서적의 약 17%가 번역 서적이라고 한다(영어권은 고작 2%). 그런데 작년 내가 읽은 책을 조사해보니, 64%가 번역서였다. 그만큼 나는 번역가들에 의존해서 세상을 보고 있다. “번역은 배신”이라는 데, 나는 그걸 별로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만큼 번역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게 번역이 원작과 관련이 없는, 배신일 뿐이라면 내가 거기서 얻는 모든 것은 무엇이란 말이가? 번역에서 원래 언어가 가지고 있던 정보가 최소한으로 소실되는 것도 원하지만, 번역으로서 달성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를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다시 번역가에게 매우 힘든 임무를 지우는 것 같지만, 그래도 (적어도 형편없는 번역을 하지 않는 이상) 그들에게 고마워할 줄은 안다.
정말 좋은 책이다. 번역에 대해서 쓰고 있지만, 언어 자체의 쓰임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문자, 언어를 통한 소통(당연히 왜곡되는 상황도 포함하여)에 대해서도, 더불어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면화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흰 고래는 모든 것을 표상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 공허다. 멜빌은 이 흰 고래를 그리려고, 연필 선을 더해 흰 고래를 그리는 대신 흰 고래를 제외한 모든 것을 그렸다. 그렇게 글자들을 새카맣게 포개어 그리고 남은 중앙의 빈 공간, 흰 여백이 바로 흰 고래다.” (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