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릭 모디아노, 《기억으로 가는 길》
《지평》,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에서처럼 현재의 소설가(장 보스망스)의 단절된 기억은 여섯 살과 21살을 향한다. 다만 21살의 기억은 40년 전이 아니라 50년 전이 되었을 뿐이다(그만큼 모디아노의 나이가 많아졌다).
여섯 살 적 기억은 여전히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 기억을 되살리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게 15년 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21살 적의 일이다. 젊은 보스망스는 그들의 인도에 의해 기억을 떠올린다. 어린 그는 사건의 목격자였다(“너는 어떤 사건의 목격자였던 것 같아.”, 137쪽). 그러나 그의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누구라도 그렇듯이 기억은 투명하지 않다(“마치 반투명 유리를 통해 보는 것 같았다.”, 147쪽). 그는 그 기억을 벗어버리고 싶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기억을 의도적으로 저버릴 수는 없다. 그게 그로부터 50년이 지나고도 그를 괴롭힌다.
원제는 ‘Chevreuse’다. ‘쉬브뢰즈’. 이 경쾌하게 발음되는 지명은 일흔이 넘는 소설가에게 50년 전의 기억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결국 쉬브뢰즈는 ‘기억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기억을 떠올려야 하는 합목적적 이유는 없다. 그냥 떠오르는 것이다. 대화 중에 그 지명이 나왔고, 그는 그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기억이 어디 나의 의지와 관계있었던 적이 있는가?
그 50년 전의 기억은 자신이 어떻게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지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그건 사실 《지평》이나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에서도 했던 이야기다. 그의 소설에서 실제의 이름을 쓴 것은 기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설 속에 그 이름을 묻어버리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는 오랫동안 그 이름을 잊고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50년이 지나 불쑥 다시 그의 의식 속으로 들어왔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기억이 어디 나의 의지를 따랐던 적이 있는가?
그렇게 그의 의식 속으로 들어온 기억의 성격은 어떤 것일까?
“그것이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는 데 걸린 시간과 거리와 관련한 모든 것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같은 날 오후에 일어났다고 믿었던 사건들이 실은 몇 주 혹은 몇 달에 걸쳐 일어났을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57쪽)
“시간은 조금씩 그의 인생의 여러 시기를 지웠다. 어떤 시절도 다음에 이어지는 시절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단절이나 눈사태 혹은 심지어 기억상실이 이어질 뿐인 삶이었다.” (61쪽)
“모든 지표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지워졌다. 한참 시간이 흘러 떠오른 이 두 사건은 동시에 일어난 것 같았고, 흡사 두 장의 사진을 한꺼번에 인쇄하는 과정을 통해 섞어놓은 듯 서로 뒤섞여 있었다.” (85쪽)
어떤가? 불투명하고 중첩되어 있는 기억들. 우리가 기억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