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 《원청》
작년 말 우연히 KBS 라디오의 ‘작은서점’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21세기 최고의 책’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딱 꽂힌 책이 바로 최민석 작가가 고른 위화의 《원청》이다(https://www.youtube.com/watch?v=B5f9tqaYH3Q). 이 소설을 고른 이유도 잘 기억이 나질 않고, 또 다른 이들이 고른 책들도 많은데 왜 이 책에 꽂힌 지도 잘 모른다. 아무튼 《원청》은 읽어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허삼관 매혈기》라는 후광 효과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 때는 《허삼관 매혈기》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분명하다. 그냥 《원청》이라는 제목만 덩그러니, 묘하게 울렸다.
약간은 촌스러운 흐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촌스럽다는 게 어떤 것인지는 설명하기 힘든데, 뭔가 있어 보이게 감추고, 사람의 심리를 깊게 들여다보면서, 스토리 위주가 아닌 감정 위주로... 그런 게 아니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팬시하지 않다? 아무튼 그런 소설이다. 생각해보면 《허삼관 매혈기》도 그랬다. 사실 촌스럽다 했지만, 다른 말로는 쉽다는 얘기다. 스토리도, 표현도 꼬아놓질 않았다. 그래서 쉽게 쉽게 장이 넘어간다. 그런 쉽게 쉽게 넘어간 장 사이사이에 어느샌가 심오함이란 걸 심어놓았다.
청나라 말기에서 중화민국으로 넘어가는 시기. 구시대의 질서는 허물어졌으나 새로운 시대의 정연함은 묘연한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그런 시대의 급격한 변화에 어떤 기여도,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으나 무질서한 시대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이들이었다. 어쩌면 그 시대의 변화와 무관하게 살려고 했기에 그렇게 되었을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시대의 흐름에 올라타야 할지를 가늠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평화롭게, 그러나 처연하게, 또 그러나 성실하게 살아가던 린샹푸 앞에 멀리 남쪽에서 온 샤오메이라는 여성이 등장하면서 그의 삶에 격변에 휩싸인다. 물론 그도 그게 격변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샤오메이와 함께 등장한 아청은 자신들이 ‘원청’에서 왔다고 했다.
린샹푸는 샤오메이가 낳아놓고 간 딸을 안고 그녀를 찾아 남쪽으로 향한다. 원청으로. 그에게 원청은 사랑하는 여인, 아이의 엄마의 고향, 그러니까 평화의 상징이지만, 그가 떠난 길은 시대의 격량 속이었다. 이는 그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원청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가 바란 원청은 그 시대에, 어쩌면 어느 시대에도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 야만의 시대 한 가운데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도끼를 들고, 총을 들 수밖에 없었다. 토비들도 그랬고, 관군도 그랬고, 시전의 사람들도 그랬다. 토비를 비난할 수는 있지만, 그들에게도 도끼를 들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었으리라. 처절한 생존 본능은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그러나 린샹푸는 고결했다. 최선을 다해서 살았고, 최선을 다해서 인간의 도리를 하고자 했다. 그 역시 생존을 위해 발버둥쳤다. 그러나 피가 튀기는 야만의 시대에는 고결함이 생존을 보장하지 못했다. 그의 마지막은 비극이었다.
린샹푸의 이야기가 끝나고, 그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샤오메이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린샹푸와도 달리 시대의 흐름에 전혀 주도적일 수 없었던, 가난한 집안의 여성 이야기다. 그녀 역시 선택이라는 것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린샹푸 곁에 있었지만, 린샹푸도 샤오메이도 그 순간 서로가 그렇게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원청’은 없다. 그러나 있다. ‘원청’은 누구라도 꿈꾸는 마을이다. 어쩌면 옛 질서를 희구하는 수구적인 바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마다 꿈꾸는 바가 다르다면 그 ‘원청’은 가장 진보적인 미래가 될 수도 있으리라. 다만 그 미래를 향하는 길이 이처럼 피가 튀기고, 살이 썩어간다면... 그건 원청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이제 《허삼관 매혈기》의 위화가 아니라 《원청》의 위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