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파텔과 리처드 파커

얀 마텔, 《파이 이야기》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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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피신 몰리토 파텔입니다.

이름의 철자 밑에 두 줄을 그었다.

간단히 부르면

파이 파텔.


‘피싱(pissing, 소변 눕는)’이라 놀림을 받기 싫어 스스로 지은 이름. ‘파이’. 소년은 프랑스 영향하에 있던 인도의 폰디체리에서 나고 자랐다.

동물원을 운영하게 되었고, 파이는 동물과 살게 되었다(그게 운명이었을까?).

힌두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이슬람교와 기독교를 접하고는 이 세 종교를 모두 믿는다. 그건 세 배의 신의 축복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래서 그는 태평양 한복판에서 난파하고도 살아남았을까?


가족은 동물원을 처분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그러나 가족과 동물을 실은 화물선은 태평양 한가운데서 가라앉고 만다(이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어찌어찌 구명보트에 홀로 남은 파이. 구명보트에는 얼룩말과 하이에나, 오랑우탄, 호랑이가 함께 있었다. 하이에나는 얼룩말과 오랑우탄은 잡아 먹고, 호랑이는 하이에나를 죽인다. 남은 건 어릴 적 동물원으로 잡혀왔던 벵골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파이 둘 뿐. 두려워하면서 의존하는 기묘한 관계가 시작된다(‘리처드 파커’라는 호랑이 이름으로써는 기묘한 이름은 호랑이를 잡아 온 사냥꾼의 이름과 그 사냥꾼이 호랑이에 붙인 이름 ‘써스티(thirsty)’를 기차역 역무원이 바꿔 기입해서 생겨난 이름이었다).


영화를 먼저 봤다(<라이프 오브 파이>).

영화는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을 소설에서도 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영상과 문자는 다르다. 문자로 쓰인 글의 아름다움도 분명 존재하지만, 그건 영상의 아름다움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면 글로 쓰인 소년과 호랑이의 이야기는 과연 제대로 영상에 담겼을까, 그게 궁금했다. 지금까지 소설을 읽고, 소설을 영상으로 담은 영화에서 실망을 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영화를 보고 감탄했는데...


영화는 소설을 꼼꼼하게 이야기로, 영상으로 만들어냈다.

사건의 순서나, 시간의 흐름 같은 것들을 바꿨을지언정 소설가가 글로 그린 것을 거의 온전히, 아니 더 아름답게 영상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었을 때의 문제가 있긴 있다. 소설을 읽으며 장면을 상상하게 마련인데, 이미 영상으로 그 장면은 내 눈앞에 있다. 그건 상상을 제한한다. 그건 한편으로는 소설을 좀더 쉽게 읽는 방편이 되기도 하지만, 소설을 굳이 쉽게 읽어야 좋은 건 아니다. 힘들여 읽은 소설일수록 오래 남는 법이니.


그렇다면 《파이 이야기》가 오래 기억에 남지 않을 소설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소설은 영화와 짝을 이뤄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살고자 하는 의지를 다룬 이야기로서, 동물, 그러니까 자연과의 투쟁과 조화를 다룬 이야기로서, 제한된 자유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 삶의 의미를 질문하는 이야기로서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두 가지 버전으로 전하는 파이의 생존에 관한 이야기의 섬뜩함으로.


“그러니까 대만 선원은 얼룩말이고, 자기 어머니는 오랑우탄이고, 요리사는…… 하이에나…… 그렇다면 이 사람이 호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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