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경, 《나는 이완용의 글씨가 궁금했다》
나도 궁금했다.
그런 이야기들을 간간히 읽었었다. 이완용이 글씨는 꽤 잘 썼었다. 여러 예술단체를 후원했고, 회장도 맡곤 했다. 독립문의 글씨(그러니까 편액)를 썼다 등등.
그러나 대놓고 인정하기도 싫었고, 그럴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더라도 글씨가 그 사람의 인생을 미화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미화가 아니라 조금의 용서도 힘들 것 같았다. 글씨가 사람의 인격을 드러낸다, 그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가 여기기도 했다.
다만 그 사람의 글씨를 많이 보지는 못했다. 인정하기 싫은데 보고 감상하거나, 분석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궁금했다. 정말 글씨가 훌륭한지, 독립문의 글자가 정말 그의 것인지.
역사학자 강민경도 그런 궁금증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나보다는 훨씬 전문적인 영역에서의 궁금증이었을 것이고, 보다 더 구체적인 것이었고, 또 그것을 확인할 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인의 궁금증과 전문가의 궁금증은 궤를 달리하고, 깊이가 다르고, 해결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래서 이완용의 글씨를 꽤 보게 되었다. 이완용뿐 아니라 비교되는 글씨도 꽤 보게 되었다. 음... 내 눈엔 이완용의 글씨는 분명 잘 쓴 글씨로 보인다. 이것을 못쓴 글씨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는 게 내 감상평이다. 물론 강민경의 분석(그리고 그가 인용한 여럿 전문가들의 평도 함께)은 그의 글씨가 뼈의 맛이 없고 살집만 예쁘기만 하다고 했다. 그런 것 같다. 그러나 <평상심시도>나 <행서 칠언시>, 저자가 소장하면서 책을 쓸 때 서재 벽에 걸어두었다는 <행서 사언시> 같은 글씨는 호방한 맛이 없지 않다.
그런데 자세히 뜯어보면 다른 느낌이 든다. 예쁘게만 다듬다 문득 지나치게 과장한 느낌. 어쩌면 과시하려는 태도 같은 게 느껴진다. 그걸로 잘 쓰지 못한 글씨라 평할 만한 자격이 나에게는 없지만, 느낌은 느낌이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내게도 그의 글씨와 그의 삶을 연결해서 평할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글씨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그가 쓴 글이 아무리 소박하다 하더라도 그가 살아간 삶은 그의 글씨와 글 모두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그런 평가를 내릴 자격을 갖추었다.
그렇다면 왜 이완용의 글씨를 들여다봐야 할까? 우선 역사 속에 한 인물, 절대 흘려들어서는 안 되는 인물의 단면에 관한 얘기는 흥미롭다. 그런데 다만 흥미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은 그 이름에 걸려 있는 많은 의미 때문이다. 어지러웠던 시대에 서화계에 드리운 여러 그늘 속에 이완용이 있었다. 그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 역사를 깊게 들여다본다는 의미다. 그리고 거기서 분명 얻을 게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