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 코프먼, 《모든 새를 보았다고 믿은 남자》
나는 이 책을 한 가지 측면에서만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몇 가지로 나눠서 독후감을 적어 본다.
1. ‘모든 새를 보았다고 믿은 남자’, 존 제임스 오듀본의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어린 시절 ‘새 박사’로 윤무부 교수란 분이 있었다. 아마 40대 이상이면 다 알지 않을까? TV에 나와서 약간은 심각한 표정으로 새에 관해서 말하곤 했던 윤무부 교수는... 모든 새를 딱 보면, 울음소리를 딱 들으면 다 알아맞힐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은, 커서 각 분야의 전문가라는 분들을 알게 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였다. 그분들이라고 다 알지는 못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윤무부 교수에 대해서 들은 얘기도 있었다. 물론 훌륭한 분이었다.
존 제임스 오듀본. 내 기억의 차례로 보자면 오듀본이 ‘미국의 윤무부’이지만, 정확한 시대적 순서로 보자면 윤무부 교수가 ‘한국의 오듀본’이라고 불려야 맞았다. 그러나 많이 다르다. 오듀본은 불멸의 이름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에 윤무부협회 같은 게 없는 이상, 미국에 오듀본협회가 있고, 그 규모와 권위가 말도 못하게 크다는 점에서 그렇다.
1800년대 초중반에 전설적인 조류학자였던 오듀본은 단지 조류학자로서만이 아니라 놀라울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운 새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아마 누구라도 그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봤을 것이다. 그게 오듀본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일 가능성이 크지만 말이다.
프랑스 나폴레옹 휘하의 장교 아버지를 둔 오듀본은 징집을 피해 미국으로 보내지고, 그는 새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성공에 대한 열망, 경쟁심, 허영심으로 똘똘 뭉친 사나이였다. 뛰어난 그림 솜씨도 지녔던 오듀본은 《북미의 새》와 《조류학 전기》라는 책으로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켄 코프먼이 밝히는 오듀본은 남의 경험과 발견을 자신의 것으로 둔갑시키고, 보지도 않은 새를 본 것처럼 그리고 신종으로 발표하곤 했던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다. 이 책은 우선 한 위대한 조류학자의 본 모습을 자세히 뜯어보는 책이다.
2. 사람은 한 가지 면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인간학의 측면에서.
그렇다면 오듀본은 우리가 버려야 할 인물인가? 노예 제도를 마치 당연한 것인 양 여겼던 인물이기도 했고, 학문의 엄격성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으며, 보았음직한 많은 새들을 놓쳤고, 잘못된 분류로 후대의 연구에 적지 않은 지장도 가져온 조류학자가 오듀본이었으니 우리는 그를 이제 기억의 한켠에서 지워야 할 것인가?
오듀본의 실체, 즉 그의 많은 결점을 낱낱이 캔 켄 코프먼은, 그러나 자신은 오듀본을 매장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인간적인 잘못은 그것대로, 학문적인 오류는 그것대로 인정하고, 그런 오류를 바로잡아 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길이라는 것이다. 인종 차별을 옹호하고 지키려 했던 남군의 장군 이름이 붙은 새 이름을 바꾸자는 제안에 대해서 켄 코프먼은,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바람직한 것이란 의견을 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듀본이라는 이가 이룩한 많은 업적들에 대해서 부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인간은 한 가지 면만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3. 분류학의 복잡하고 미묘한 측면에서.
주로, 아니 거의 새의 분류와 명명에 대한 얘기로 가득 찬 책이다. 그래서 사실 그런 부분은 ‘글자’는 읽었지만, ‘글’을 읽었다고는 할 수 없다. 새의 분류 자체에 관심이 있지 않고서야 이 책의 분류학적 쟁점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자면 몇 달이 되어도 마지막 장을 덮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꼭 그런 식으로 읽을 필요는 없는 책이라 본다. 나는 분류학의 복잡 미묘한 측면에서만 이해를 하더라도 충분히 잘 이해하면서 읽었다고 할 수 있다고 여긴다. 생물의 분류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종의 개념, 혹은 종의 범위/구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종(species)이야말로 분류 내지는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면서 쉽지 않은 개념이다. 어디까지를 같은 종이라 봐야할지는 늘 논란이 되는 지점이다. 얼마나 다른 것을 다른 종으로 봐야할 지에 대해서 오듀본과 그 이전, 이후의 조류학자들은 논란을 벌였고, 그것은 새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다.
또한 발견자로서의 권리의 문제도 있다. 켄 코프먼이 어린 시절 ‘발견’이라는 말을 자주 쓰다, 선생님으로부터 잘못된 표현이라고 지적받은 것처럼(좀 심하긴 했다!), 어떤 종의 발견은 대단히 엄격하면서 민간한 문제다. 단순히 새로운 새를 보았다 해서 그 사람이 그 새로운 새의 발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새로운 새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그냥 인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 새로운 새가 왜 신종인지 밝혀야 하고,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규칙에 맞게 학명을 붙여야 한다. 분류학은 쉬운 학문이 아니다.
4. 켄 코프먼의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켄 코프먼은 작가 소개에서부터 ‘전설적인 존재’라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새를 좋아했고, 10대에는 히치하이킹을 통해 미국, 캐나다 전역을 돌아다니며 새를 관찰했다. 이 때의 경험은 책 중간중간에 소개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삶의 도전이었다.
또 다른 도전도 있다. 그는 이 책과 함께 하나의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오듀본처럼 그리기. 이에 관해서는 각 장(chapter)의 사이사이에 ‘막간’이라고 해서 ‘새를 그린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짧게 짧게 전하고 있다. 오듀본은 새를 실감나게 그리기 위해서 갓 죽은 새를 고정시켜 마치 살아 있는 모양처럼 만들고 그것을 그렸다 한다. 켄 코프먼은 그런 방법은 쓸 수 없었다(그건 불법이다). 대신 사진을 두고 그렸다. 오듀본이 그린 스타일을 흉내내고, 그의 그림 도구와 기법을 써서, 같은 크기로 그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백한다. 그건 ‘비전 임파서블’이라고. 전설은 절대 쉽게 복제되지 않는다면서, 왜 오듀본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예술이란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게 아니라 자신 내면의 비전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책의 두 번째 도전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다 내가 아는 조류학자에게 카톡을 보냈다.
“이 책 너무 재미있네요. 꼭 읽어보세요.”
개인적인 책 추천을 잘 하지 안는 나지만, 이 책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떻게 읽을지 궁금하다. 나는 그냥 넘겨버린 많은 장면들을 그는 의미를 두고 읽을 것이다. 읽고 난 후 그의 감상을 꼭 듣고 싶다.
“새로운 발견을 위해 자연주의자들이 아무리 만반의 준비를 하고 현장으로 나가도, 바로 눈앞에서 새로운 것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은 씁쓸한 현실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놓쳤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지나친다. 인간의 일생은 너무 짧아서 생물의 다양성과 자연의 풍요로움을 전부 이해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작은 시도도 우리의 일상을 기쁨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