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라슨의 『얼음의 제국』
영국의 남극점 탐험대장 스콧은 몇 명의 대원과 함께 드디어 남극점에 도달한다. 1912년 1월 17일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노르웨이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편지와 함께. 노르웨이의 아문젠이었다. 그는 스콧보다 한 달이나 먼저(1911년 12월 14일) 남극점에 도달했고, 이미 그 소식은 영국까지 전해진 후였다. 스콧과 그의 대원들의 최후는 잘 알려져 있다. 돌아오는 길에 극한의 추위에 모두 사망하고 만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남극점을 향한 두 팀, 두 국가의 경쟁, 한쪽의 승리와 한쪽의 비참하면서도 장엄한 최후 등으로 알려졌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어릴 적 읽은 <세계 10대 탐험가> 등의 책을 통해 아문젠의 승리와 스콧의 패배라는 분명한 선을 긋고 이해했었다.
그런데 에드워드 라슨은 『얼음의 제국』에서 좀 다른 얘기를 한다. 우선 질문부터 다르다. 그들이 남극(점)을 향한 경쟁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남극으로 갔는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거의 스콧을 향해 있다(아문젠에 관한 내용은 정말 적다). 아니 스콧을 비롯한 새클턴과 같은 영국의 탐험가들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 질문과 이야기의 방향 전환을 통해 스콧의 비극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19세기는 제국주의 팽창의 시대였다. 제국주의 국가, 특히 영국은 거의 모든 대륙을 지배했다. 미개척지에 대한 지배는 우선 그곳에 대한 탐험으로부터 시작된다. 아프리카마저도 리빙스턴의 탐험 이후 알려진 대륙이 되자 남은 곳은 극지 밖에 없었다. 피어리의 북극점 탐험(조금 의심스럽긴 했지만) 이후 사람들의 관심은 남극으로 향했다. 그들은 그곳을 지배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탐험해야 했다. 그러나 영국의 남극 탐험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탐험을 주도한 곳은 RGS(Royal Geographical Society)와 왕립학회였다. 즉, 단순히 그곳에 갔다 왔다가 아니라 그곳을 알아야 하는 것, 과학의 문제였다. 지자기의 비밀을 캔다든가. 진화의 증거를 찾기 위한 화석 수집, 암석 수집, 해양생물 발견 등. 탐험대에는 반드시 과학책임자가 따라 붙었고, 탐험대장도 스스로 과학 연구자를 자처했다.
물론 새클턴이나 스콧도 남극점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목표가 아니었다. 남극점을 향하지만 동시에 과학 연구도 수행해야 했다. 반면 아문젠은 남극점 도달 자체가 목표였다(“남극점 도달이라는 유일한 목적에 사로잡혀 있던 아문젠과는 달리, 스콧의 탐험은 여러 가지 목표가 혼재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단순히 남극점을 향한 영웅들의 경쟁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도 역사를 단순히 보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재미(?)있는 것은 스콧의 최후에 대한 반응의 변화이다. 처음에는 그 비극에 대한 반응은 그들의 과학적 성과에 대한 경의였다. 그러나 과학에 맞춰졌던 애도의 분위기는 스콧의 최후의 순간에 쓴 글로 감동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또 교묘하게 바뀌는데, 이제는 과학의 성과에 대한 관심은 사그러 들고(RGS마저도 그들의 과학적 성취를 경감시켰다) 아문젠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패배자로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보면서 역사는 이렇게 관점의 변화가 인물과 사건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게 된다는 다시금 깨닫게 한다.
영웅을 찾던 시대. 영웅이 되고자 했던 사내들의 분투. 남극의 얼음장 위에서 펼쳐진 욕망과 헌신의 고투, 그리고 수많은 실패와 드문 성공의 이야기. 『얼음의 제국』은 그런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