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이윽고 슬픈 외국어》
연보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40대 초반 무렵 유럽과 미국을 전전했다(‘전전했다’라는 표현이 좀 뭣하기는 하지만 특별하게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리 표현해도 별 무리는 없어 보인다). 《이윽고 슬픈 외국어》는 그와 그의 아내가 미국 뉴저지주의 프린스턴 대학에 머물던 시절의 이야기다(글 중간에 아인슈타인이 그 대학에 있었다는 내용이 잠깐 나오는데, 그건 잘못되었다.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 대학이 아니라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있었다). 1991년 초반부터 약 2년 반에 걸쳐 있었다(그 후로 그는 다시 보스턴 쪽으로 건너가 2년을 보낸다).
지금 이 에세이집을 읽는 것은 당연히 미국 문화에 대해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게 아니다(아마 일본 독자라도 그럴 것이다). 이미 30년 가까이 지난 이야기. 게다가 일본 작가가 미국에 체류하면서 겪고 느낀 바에 대한 이야기다. 오히려 미국 문화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고자 한다면 다른 찾아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책은 정말 많으니.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책이라 읽는다. 그러니까 미국을 알기 위해서, ‘일본인’이 바라본 미국, 혹은 미국과 일본의 차이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좀 더 알기 위해서 읽는다.
그렇다면 이 에세이집의 하루키는 어떤가? 소설로서 접하는 하루키를 연상케 하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여기의 하루키는 소설의 하루키와 분명 달라 보인다. 우리가(‘나’는 아니었지만) 하루키에 열광했던 이유, ‘추천의 말’을 쓴 남진우에 의하면, ‘가벼움’, ‘무국적성’, ‘상실감’ 같은 것을 이 에세이들에서는 별로 느낄 수가 없다. 대신 상당히 성찰적인 하루키가 다가온다. 세심하게 미국의 문화를 관찰하고, 그것을 일본의 것과 비교하면서 새로운 시각에 이르는 과정이 한 편 한 편의 글에 담겨 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보다(물론 그런 게 전혀 없진 않다) 문화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는 방식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처럼 여겨진다. 아마도 이 에세이집을 읽지 않았다면 다음과 같은 하루키는 잘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내 자랑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무리고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다. 어느쪽이냐 하면 몸을 실제로 움직여 사물을 생각하는 인간이다. 몸을 통하지 않고는 사물을 배우거나 글을 쓰거나 할 수 없는 인간이다. 그건 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아침부터 밤까지 실제로 몸을 움직여서 생활할 양식을 벌어온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230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과 그의 내면, 자취를 읽는 즐거움과 함께 (의외로) 그가 느낀 미국과 일본 문화의 비교도 흥미롭다. 솔직하게는 거기에 우리의 문화를 끼어넣게 되는데, 어떤 것은 미국 쪽에, 또 어떤 것은 일본 쪽에 가깝다는 것을 발견한다. 흥미롭기도 하지만, 우리의 근현대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은 좀 씁쓸하기도 한 부분이다(물론 어느 쪽으로도 볼 수 없는 우리의 문화도 있다).
또 잘 납득, 긍정하지 못하는 얘기도 있다. 심각한 것은 아니고, ‘이발’ 같은 것이다. 그는 일본보다 못한 미국의 이발 실력에 투덜대지만, 경험상 일본의 이발 실력은 우리에 댈 게 못 된다. 또 하나는 자동체에 관한 그의 선호인데, 역시 그다지 공감 가지는 않는다. 물론 글에서부터 개인적인 취향을 강조하고 있으니, 그가 독자에게 공감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