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핸킨스, 《과학과 계몽주의》
근대 과학과 계몽주의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그런데 그걸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18세기의 과학은 계몽주의와 어떤 관련성을 갖는지에 관해 논의해보라고 하면 술술 나오는 건 아니다. ‘관련’이라는 간접적인 관계성을 나타내는 표현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으면서도 단순한 연대적 관련성을 넘어서는 논의를 전개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낀다.
토머스 핸킨스의 《과학과 계몽주의》는 계몽주의라는 철학적 조류와 함께 근대 과학사라는 또 다른 분야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칸트가 “난 계몽의 시대(an age of enlightenment)에 살고 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계몽주의는 18세기 과학혁명의 전개와 명백하게 관련되어 있다. 계몽주의라는 의식의 변화가 과학의 발전을 이끌었다고도 할 수 있고, 또 반대로 과학에서의 발전이 계몽주의라는 새로운 의식의 출현을 가져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토머스 핸킨스의 관점은 아무래도 후자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이른바 계몽주의의 철학자들이 대부분이 과학적 배경을 갖추고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달랑베르는 수학자였고, 심지어 칸트도 과학과 관련한 논문을 발표했었다. 논리적으로도, 이성을 중시한 계몽주의의 자양분은 당연히 과학에서 올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근대 과학은 그 시기에 혁명적 발전이 이루어졌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다시 계몽주의, 혹은 그에 비견되는 의식의 전환에서 찾을 수밖에 없어, 어쩌면 순환 논리에 갇히게 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근대 과학이 추동해낸 계몽주의라는 개념이 더 화살표의 두께가 두꺼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토머스 핸킨스는 계몽주의와 관련한 18세기 과학의 흐름을 몇 가지로 나누고 있다. 그건 지금의 과학의 분과에 강력하게 이어지면서도 다소 다르기도 한다. 우선은 ‘수학과 정밀과학’이다. 수학이면 수학이지, 왜 정밀과학이 덧붙여졌냐를 보면, 수학이 더 이상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원리를 찾아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학문에서 벋어서 실제적인 물리적 자연현상을 계산하고, 기술하는 데 기여하는 학문적 ‘언어’로 변해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다음은 ‘실험물리학’이다. 18세기 과학혁명으로, 비로소 실험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이 정착되었다. 그리고 연금술의 미신적 요소와 결별하고, 물질과학으로 전환한 ‘화학’, 생물학의 기초가 된 ‘생리학’(물론 이 ‘생리학’이 지금 예기하는 생리학과는 다소 다르긴 하다). 이런 것들이 당시 과학혁명의 구성 요소였고, 계몽주의에 기여한 분야였다.
다소 의외인 것은 마지막 장인데 제목이 ‘도덕 과학’이다. 당시의 과학이 포괄하는 분야가 지금과는 달리, 과학으로 사회 정치적인 영역까지 포괄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나 신의 문제까지도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역시 계몽주의와 관련성을 갖는 과학혁명의 한 성과이자 한계라고 할 수 있어 보인다.
현대의 과학은 그냥 불쑥 튀어나온 게 아니다. 이런 사상적 변화를 가져온, 혹은 그 사상적 변화에 기초한 과학이 있었기에 지금의 과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