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고양이를 버리다》
글쎄. 이런 글을 읽으면 나도 아버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버지 이야기를 읽으며 그 아버지의 삶에 대해 알아야 할 건 아니다(그의 삶에 내가 감동하거나 배워야 할 건 없다). 대신 내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그로부터 나에게로 이어져 온 삶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만큼의 필력도 없고, 또 그의 아버지와 같은 극적인 스토리가 내 아버지에겐 없을 듯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내 아버지라고 해서 할 얘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 또 쓰자면 모자란 만큼 쓸 수도 있을 터이다(누구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내 나이에 이른 사내의 대한민국 아버지에게 어디 이야깃거리가 모자랄까 싶다. 고난의 세월이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수도에서 가장 외진 지역의 가난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서 살아온 세월이 간단하지 않았을 건 뻔하지 않은가? 아버지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쏟았던 기억도 문득 떠오른다. 아주 오래된 얘기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짧은 에세이가 추억을 떠올리며 눈물샘만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아버지를 추억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아니다. 오랜 세월 교류 없이 살았고, 아버지가 죽기 전에야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나도 아버지의 삶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깊게 들어본 적이 없고, 그럴 기회가 올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저 담담하게 아버지의 우연스런 삶을 이야기하고 있고, 더 중요하게는 그렇게 해서 이어진 ‘나(여기선 무라카미 하루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끈끈하게 지내지 못했지만, 결국엔 아버지에게서 자신에게로 이어진 끈질긴 삶의 끈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게 ‘역사’라고.
우연과 행운이 겹쳐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버지(중일 전쟁과 2차 세계대전 와중 세 차례나 징집되었지만, 전쟁에서 살아남거나, 용케 일찍 제대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난징 대학살에 대해 다룬 것이 떠올랐다)와 전쟁 때문에 결혼 상대가 죽어 결국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로 인해 태어난 게 바로 자신, 무라카미 하루키였기에, 그래서 그는 이 짧은 글에서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이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 - 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 -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 속이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51쪽)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93쪽)
그러고 보면, 세계사든, 나라의 역사이든, 가족의 역사이든, 나의 역사이든 우연이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렇게 결정된 역사는 결국은 현실이 되고 만다. 그래서 어느 것이건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것은 없지만, 어느 수준의 역사이건 가벼운 것은 없고, 부인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역사라는 건 그런 것이다 - 무수한 가설 중에서 생겨난 단 하나의 냉엄한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