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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Nov 06. 2020

과학의 서사, 도브잔스키와 ABT

랜디 올슨, 《과학을 아우르는 스토리텔링》

과학자가 하는 이야기는 지루하다? 사실 과학자도 자신의 이야기는 신나서 얘기할 수 있고, 또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것이면 아무리 지루한 이야기라도 진지하게 들을 수 있지만, 거기서 조금만 벗어나도 과학 발표는 따분하기 이를 데 없다. 온갖 관찰 사실과 실험 결과들의 나열. 저것들이 어떤 연관을 갖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시간은 흘러가고, 마지막 가서 간단한 요약으로 끝을 맺는다. 발표도 그렇지만 글도 그렇다. 많은 과학자들의 연구계획서는 읽기 괴롭다. 이 연구가 왜 중요한지, 어디까지 연구가 이뤄져 있는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 일목요연한 경우를 보기 힘들다. 그래서 그런 연구계획서를 보면 꼭 간직하고 싶어진다(물론 그런 걸 금한다).


랜디 올슨은 과학 발표나 연구 보고서, 논문, 연구계획서가 그리도 따분한 이유를 서사(narrative)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전개 자체가 딱 흥미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헐리우드를 배우라고 한다.


웬 헐리우드? 그건 랜디 올슨의 이력을 보면 하필이면 왜 헐리우드를 지목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원래 과학자였다. 해양생물학자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었고, 대학에서 종신지위(tenured)도 획득했다. 하지만 과감히 그 지위를 내던지고 영화 쪽으로 급격한 방향 전환을 한다. 영화를 배우고 연출했다. 그는 헐리우드가 대중들에게 그때그때마다 인정받아야 하는 상황을 지적하며 바로 그 직관과 어법을 배워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랜디 올슨이 이 책을 읽는 ‘과학자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그런 헐리우드의 상황이라든가 직관 같은 게 아니다(상황이 다른 데 똑같이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 혹은 연습이 되어야 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저명한 진화학자이자 유전학자였던 도브잔스키의 어법을 응요하는 것이다. 1960년대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의 문장은 수많은 논문과 책에서 반복되었다. "진화의 관점을 제외하면 생물학에서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물학에서 진화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문장이지만, 저자는 이를 도브잔스키 양식이라고 해서 중요한 서사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__________을 제외하면 ____________의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다.”와 같이 밑줄 친 곳에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것을 넣어서 얘기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판 구조론을 제외하면 지질학의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다.”나 “유전병을 제외하면 내 삶의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다.”와 같은 식이다. 일단 한 가지 배웠다(난 도브잔스키의 저 표현을 응용한 아얄라의 문장을 내 박사학위 논문에 쓴 적이 있긴 하다).


그 다음은 ABT 양식이다. ABT 양식이란, 어떤 이야기를 하는데 있어서(논문도 마찬가지다) “_______ And ________ But ______ Therefore__________”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이렇게 했을 때 글쓴이가 하고 싶은 말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고, 또 읽는 이가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and, and, and와 같이 AAA 양식의 경우에는 글이 지루하며 결론이 없게 된다고 하고, 또 DHY, 즉 despite(그런데도), however(할지라도), yet(그렇지만) 양식의 경우에는 논리의 전개가 매우 복잡해져 혼란을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ABT 양식을 훌륭하게 지킨 글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왓슨의 《이중나선》과 함께 노벨상 수상자의 논문 초록 등을 소개한다. ABT 양식은 어렵지 않으면서 어디나 적용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역시 배웠다(그런데 내가 이 글을 그 양식에 따라서 쓰고 있는지 긴가민가하다).


사실 과학도 스토리(story)다. 스토리가 있어야만 가치 있는 연구가 되고, 또 관심을 갖는다. 스토리이니 서사(narrative)가 필요하다. 그 서사는 그냥 쓰고 이야기하면 당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훈련이 필요하다. 그 훈련으로 (저자는 그 밖에도 다른 것을 제시하고 있긴 하지만) 도브잔스키와 ABT는 기억해 둘 만하다. 아니, 꼭 기억해두고 적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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