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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Nov 20. 2020

모든 것이 오웰적!

아드리앙 졸므, 《조지 오웰의 길》

책 끝에 덧붙여진 조지 오웰의 짤막한 연보는 다음과 같다.

 

1903년 에릭 아서 블레어영국령 인도의 모티하리에서 출생.

1911년 성 시프리언 기숙학교에 입학.

1917년 이튼 칼리지 입학.

1922년 버마의 영국 식민지 경찰에 입대.

1928년 파리에 정착.

1936년 공화파 진영에서 싸우러 스페인으로 감.

1941년 BBC 방송국 선전부에서 일함.

1946년 스코틀랜드 주라 섬에 정착.

1950년 런던에서 결핵으로 사망.

 

이 짧은 연보의 지리는 모두 이 책에서 저자가 쫓은 조지 오웰의 자취다(하나 예외가 있다면 ‘BBC 방송국 선전부). 저자는 이튼 칼리지버마파리위건(왜 이건 연보에 없지?), 스페인주라 섬을 통해 조지 오웰을 읽는다조지 오웰의 자취는 그대로 그의 작품과 대응한다버마에서의 식민지 경찰의 경험은 몇 편의 단편과 함께 버마 시절파리에서 밑바닥 생활은 그의 첫 작품인 에세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인생위건에서의 취재 생활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그리고 스페인 전쟁에서의 경험은 카탈루냐 찬가그리고 주라 섬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최고의 작품인 1984이 대응한다심지어 저자가 책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은 BBC 방송국 선전부는 아마도 1984과 함께 동물농장이 대응할 꺼다그러니까 조지 오웰의 자취를 쫓는다는 것은조지 오웰의 작품을 보다 섬세하게 이해하기 위한 방편이 된다는 얘기다.

 

이 짧은 책은 아드리앙 졸므가 <르 피가로>지에 실린 르포가 바탕이 되었다그는 조지 오웰이 머물렀던 곳을 취재했으며거기서 조지 오웰의 흔적을 찾았다그 흔적 찾기는 결국의 조지 오웰이 어떤 사람인지그런 사람이 어떻게 그런 작품을 남기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위한 길이었다한 작가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그가 처한 위치와 경험을 탐구하는 것은 매우 고전적이고정통적인 방법이지만그런 방식이 늘 그 작가의 내면과 함께 작품 세계를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것은 아니다하지만 조지 오웰은 다르다그의 자취가 그대로 그의 작품에 드러난다아드리앙 졸므는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조지 오웰분명 나는 그의 작품(1984과 동물 농장)을 읽었지만아득하다그 작품에 대해 말할라치면 마치 피에르 바야르의 읽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수법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읽지 않았어도 그 내용에 대해서는 환한 경우다읽었어도 읽은 기억보다 마치 읽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그러니까 무척이나 유명한 책이란 얘기다.

 

그러면 그는 어떤 인물이었나아드리앙 졸므는 조지 오웰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녔던 관찰자였지만 냉소주의자나 차갑고 무심한 분석가가 아니라시종일관 현실에 최대한 열중하고자 했던 증인”.

자신의 눈으로 보았던 대로 썼기에그의 경험이 그를 만들었다식민지 경찰의 경험이 있었기에 맹렬한 반(식민주의자가 되었고파리와 런던의 빈민굴 체험과 맨체스터(위건)의 광산촌 생활은 그를 사회주자가 되게 했다사회주의자였고 열혈한 반파시스트였지만스페인 내전에서의 경험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전체주의에 대한 결연한 반대자가 되었다그래서 그는 어느 쪽으로도 분류하기 힘든 인물이 되었다사회주의자로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고발할 때는 좌파가 만족스러워하지만완고한 반공주의자였고좌파 지식인들에 대해 경고도 마다하지 않았을 때는 우파가 환호했다그와 같은 이유로 좌파에게서우파에게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최근에는 기계화기술적 감시인간성 말살’ 등에 대한 비판이 조명되면서 생태주의자들의 영웅이 되었다그는 영원히 어느 편이 될 수가 없었지만사회적 맥락 속에서 누구의 편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아드리앙 졸므는 조지 오웰의 자취를 쫓는 것을 마치고마지막 장에 모든 것이 오웰적이다!”라는 제목을 붙였다. CCTV로 대표되는 대도시의 광범위하고도 촘촘한 감시 체계와 함께 미국의 이라크 등 전세계에서 벌이는 끝없는 전쟁들에르도안에 의한 터키의 독재중국의 자본적 공산주의 체제 등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아니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에 우리는 오웰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그렇게 보면 그를 이른바 예언자’, 혹은 예언적 작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아드리앙 졸므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앞서도 얘기했지만그저 있는 그대로 보고자 했기에틀릴 수도 있었지만 통찰력 있는 작품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어떤 의미에서건 우리는 오웰적 세계에 살고 있다벗어날 수 있을까글쎄... 이 질문에 회의적일 수 밖에 없는 우리는 다시 오웰을 찬찬히 읽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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