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용의 《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
전곡리 유적이 발견된 것은 1978년의 일이다. 주한미군에 근무하던 고고학도 그렉 보웬이 여자친구와 함께 한탄강을 거닐다(사실은 굉장히 계획적인 답사였다고 한다) 희한하게 생긴 돌조각을 발견한 후의 일이다. 보웬은 보고서를 작성해서 프랑스의 학자에게 보냈고, 그 프랑스 학자는 당시 서울대 박물관장이었던 김원용 교수에게 알려 전곡리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했다. 전곡리 유적에서는 서구의 구석기 유적에서만 발견되던 주먹도끼가 발견되어 세계 구석기 연구의 흐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얘기는 미리 알고 있던 게 아니라 바로 전곡선사박물관의 관장으로 있는 이한용의 책 《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에서 알게 된 사실이다. 30년째 전곡리 구석기 유적과 인연을 맺어온 이한용 관장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프랑스나 스페인의 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상황에 대해서 읽은 기억이 나면서 우리나라의 유적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몰랐었나, 약간 자책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자랑이라고까지 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곁에 두고 있는 훌륭한 유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건 조금은 의아하면서도 부끄러운 일이다.
《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는 주로 구석기 시대에 관한 얘기다(이한용 관장이 연재하고 있는 신문의 칼럼 제목도 <구석기 통신>이란다). 구석기 시대는 참 아득하다. 물론 지구의 역사에 비추면 무척이나 최근이 일이지만, 인류에게는 이제 비로소 동이 트기 시작하는 시절의 얘기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굉장히 의구스런 일이라 여겼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아주 제한적인 증거를 가지고 ‘이야기’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러나 이한용 관장의 글을 따라가 보면, 물론 불확실한 얘기도 많지만, 그래서 아직 논쟁 중인 부분이 적지 않지만, 상당히 논리적인 증거로 그 아득한 시절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두개골만 가지고 언제쯤 직립 보행을 했는지를 알아낸다든가, 뼈에 뚫린 2개의 구멍을 가지고 인류의 시작이 사냥꾼이 아니라 사냥감이었다는 것을 알아낸다든가, 화산재가 걷힌 땅에 찍힌 발자국을 가지고 이 시대의 인류의 모습을 유추해낸다든가 하는 것들은 상당히 논리적이고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고고학, 고인류학은 과학적인 증거에 기초한 학문이라는 얘기다.
내가 앞에 놓인 선사 시대의 유적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박물관의 관장이 곁에 다가와서 그 유적에 대해 친절하게 이러저러한 얘기를 두런두런 전해주는 느낌이다. 아주 전문적이지는 않아 쉽지만, 그래도 충실한 얘기들을 많이 담고 있다. 인류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진화해 왔는지, 지금의 호모 사피엔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와 함께 존재했던 네안데르탈인이라든가 데니소바인과 같은 이야기까지 덧붙인다. 이 네안데르탈인이라든가 데니소바인과 같은 인류의 사촌의 존재는 특히 요즘 핫한 주제이니만큼 더욱 흥미롭다. 인류는 처음으로 두 발로 일어서고, 사냥감에서 사냥꾼으로 진화하고, 음식을 불로 요리해 먹으며, 주먹도끼를 만들고 개선해나가고, 바늘을 만들어 옷을 만들어 입으며 추운 빙하기를 견뎌냈고, 결국은 이 지구를 벗어나 우주에게까지 발자국을 남기게 되었다. 대하 드라마 같은 얘기들이 이 두껍지 않은 책에 다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