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화이부동(和而不同)

조윤제의 『다산의 마지막 공부』

by ENA

제목 “다산의 마지막 공부”란 『심경(心經)』을 의미한다. 『심경(心經)』은 주자의 제자였던 송나라 시대의 진덕수란 이가 편찬한 책이라고 한다. 편찬했다는 것은 그가 직접 쓴 게 아니라 여러 책에서 좋은 글들을 골라서 모았다는 의미다. 주는 사서삼경이었고, 그 밖에도 여러 송나라 학자들의 글을 모았다. 기준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음’에 관한 것, 마음을 수양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이었다. 그런데 이 『심경(心經)』은 중국에선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조선의 선비들이 여기에 관심을 쏟았다. 다산도 그랬고, 정조도 그랬다.


『심경(心經)』의 각 장을 소개하고, 그 의미와 전후 대목을 소개하는 이 책을 오랫동안 읽으며(정말 하루에 몇 페이지씩 오랫동안 읽었다), 그 내용보다 그 내용보다 그 전후 사정에 더 관심이 갔다.


다산이 『심경(心經)』을 펴든 것은 오랜 유배 생활 도중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공부를 이 『심경(心經)』으로 마무리짓고자 했다. 어쩌면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자신에 대한 수양으로 돌아오는 게 대학자의 자연스런 순리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생사를 가를 위기에서 겨우 살아났지만, 오랫동안 유배라는 고난을 겪고 돌아온 다산은 세상에 대해 용서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혹은 그 고난을 이겨낸 근거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그게 바로 ‘마음’이라고 생각했고, 『심경(心經)』을 파고든 이유였을 것이다. 평온한 마음, 안정적인 마음, 자신을 다스리는 마음.


현대에도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은 잘 알지만 쉽지 않다. 성급함에 분노와 짜증에 휩싸이고, 소리를 내고, 동요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그나마 반성하면 다행이지만, 자신을 변명하고, 그게 당연한 세상살이의 방법이라고 여긴다. 분노와 쏟아냄이 일상화된 세상은 서로 격렬하게 맞부딪히는 것만이 해결의 방법이라고 여긴다. 그 끝은…


사실 이 지극히 당연하고도 뻔한 말들이 지겨웠다. 들어보지 않은 것도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깊게 생각했던 것도 별로 없는 지극히 옳은 말씀들. 그런데 다 읽고 덮으니 왜 이런 말들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하나의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들이, 그 내용들이 모두 모여 있는 그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


많은 좋은 말들이 있지만, 끝까지, 그리고 지금까지 뇌리에 남아 있는 문구가 하나 있다. “화이부동(和而不同), 동이불화(同而不和)”가 그것이다.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도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어제 TV에서 트랜스잰더에 대한 방송을 봤다. 한 여대의 ‘일부’ 학생들이 대학에 합격한 트랜스잰더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한 것을 보면서 (결국 그 트랜스잰더 학생은 입학을 포기했다고 한다. 나는 싸웠으면 더욱 좋았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그 학생에게 가혹한 일일 것이다) 더욱 이 말이 생각났다.



800x0.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구석기에서 현재로, 호모 사피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