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골드먼의 『진화의 배신』
이 책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목들(우리말 제목, 우리말 부제, 원제 등)의 의미를 풀어보면 될 것 같다.
우선 우리말 제목 “진화의 배신”이다.
진화(Evolution)에 대해서 언뜻 생각하면, 더 좋은 것으로의 변화, 즉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잘못된 생각이다. 진화란 적응(adaption)이며, 적응이라는 것도 바로 그 상황에 조금이라도 생존률(survival rate)을 높이거나, 생식률(reproduction rate)을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물론 이것도 굉장히 단순화시킨 것이긴 하다). 먼 미래를 생각하는 게 아니며, 그런 변화(실제로는 개체가 변화하는 것도 아니다)가 늘 좋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쁜 경우가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진화’는 늘 ‘배신’의 요소를 지닌다. 지금 당장 좋은 것이 나중에는 그렇지 않은 것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말이다(여기서 ‘나중’이라는 것은 굉장히 긴 시간 규모를 의미한다). 그래서 “진화의 배신”이라는 우리말 제목이 매우 도전적인 것 같지만, 실은 진화에 관한 의미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 제목인 셈이다. 그렇다. 이 책은 진화에 대한 얘기이며, 그 진화된 형질이(더 정확하게는 어느 시점에는 인간에게 적응적인 형질이) 현대에 와서는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얘기이다.
그래서 이 책의 우리말 부제는 “착한 유전자는 어째서 살인 기계로 변했는가”이다. ‘착한 유전자’나 ‘살인 기계’가 너무 어떤 가치를 의미하는 용어라서 거북하긴 하다. 실제로 유전자 중 ‘착한 유전자’도 없고, ‘살인 유전자’도 없다. 유전자는 묵묵히 자기 일만 할 뿐이다(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유적인 의미로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착한 유전자’라는 것은 과거에 인류에게 생존과 전파에 도움이 되었던 유전자라는 의미다(좀더 정확하게 얘기해서는 ‘유전자’라는 용어보다는 ‘형질’이라는 용어 더 적절할 것 같지만). ‘살인 기계’라는 것은, 그렇게 도움이 되었던 유전자 내지는 형질이 지금에 와서는 해(害)가 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니까 정확히 “진화의 배신”인 셈이다.
이 책의 원제는 “Too Much of a Good Thing”이다. 좋은 것이 과도하다는 의미인 듯 하다. 역시 여기서도 ‘좋은 것’이란 과거, 구석기 시대에 인류의 생존과 생식에 도움이 되었던 유전자, 아니 형질을 의미한다. 그게 생존과 생식에 도움이 되었으니 인간 집단에 전반적으로 퍼졌다. 그런데 그게 상황이 바뀌면서 좋은 것이 과도한 경우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저자는 그런, 과거에는 인류에게 유리한 형질이었으나 지금은 골칫거리(골칫거리 수준을 넘어선다)가 되어 버린 특성을 네 가지 제시한다. 그래서 이 책 원서의 부제가 “How Four Key Survival Traits Are Now Killing Us”다.
그 네 가지 특성(본능)이란, ‘식욕과 열량 축적의 본능’, ‘물과 소금에 대한 욕구’, ‘싸울 때, 도망칠 때, 복종할 때를 판단하는 본능’, ‘출혈로 죽지 않도록 피를 응고시키는 능력’이다. 물론 이 밖에도 인류가 출현하고 종으로서 생존하기 위해서 도움이 되었던 형질은 무수히 많다. 그런데 심장병의 권위자인 저자가 이 네 가지를 꼭 집은 것은, 그것들이 현대에 와서 우리에게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식욕과 열량 축적의 본능’은 비만으로, 나아가 당뇨병, 심장 질환으로 이어진다. ‘물과 소금에 대한 욕구’는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욕구이지만, 그것이 제어되지 못하면서 고혈압으로, 심장 질환으로, 뇌졸중으로, 신장 질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싸울 때, 도망칠 때, 복종할 때를 판단하는 본능’은 폭력이 난무하던 시기에는 인류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성향이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나아가 자살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출혈로 죽지 않도록 피를 응고시키는 능력’ 역시 출혈이 죽음의 주요 원인이었을 때 진화시킨 것이었으나, 지금은 출혈보다는 혈액 응고로 죽을 확률이 더 높아졌다. 바로 심장 마비와 뇌졸중 같은 것들이다.
저자는 이 네 가지 진화 형질이 어떻게 인류를 생존시키고, 번성시켰는지를 먼저 얘기하고 있다. 그러고는 그런 진화 형질이 또 어떻게 현대의 질병으로 이어졌는지를 이야기한다. 말하자면 진화 의학(Evolutionary Medicine)이고, 다윈 의학(Darwinian Medicine)이다. 그런데, 의사답게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예상하고 있으며, 이런 진화 형질에서 비롯된 질환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방안들이 강구되어 왔으며, 어떻게 하는 것이 나은지까지 논의한다.
재미가 있기로는 1부에서 다루는 ‘인류를 생존시킨 네 가지 형질의 비밀’이지만, 실제적이고 도움이 되는 것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에 대한 탐색 2부 ‘현대 사회에서 우리 몸 보호하기’이다. 잘 알아야 극복할 수 있으며,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짧은 시간에 유전자를 변화시켜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약과 수술, 그리고 행동의 변화를 통해서 극복해야 한다고, 극복할 수 있다고 쓰고 있다. 우리 몸과 정신의 진화된 형질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에 무기력하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헤쳐나가기 위한 방안들인 것이다.
이제 진화 의학은, 거의 ‘진화’란 말을 쓰지 않고도(이 책에서 ‘진화’라는 용어는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른 것 같다. 굳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현대의 질병의 원인을 설명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기본적인 지식 같은 게 된 것이다. 그런 걸 모르더라도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치료를 받는데, 심지어 의사들이 처방을 내리는 데도 그리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 몸을 이렇게 만드는지도 모르는 상태보다는 우리의 현재가 수십 만년, 수백 만년 전의 진화의 결과라는 것을 아는 것이 좋지 않은 상황에 대처하는 데 훨씬 나으리라는 것을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진화 의학이라는 타이틀은 걸지 않았지만, 진화 의학이 무엇을 알아냈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이 책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