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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Jan 26. 2021

장벽은 누가 쌓는가?

데이비드 프라이, 《장벽의 문명사》


영화 <블랙팬서>에서 와칸다제국의 왕위 계승권을 둔 싸움에서 두 왕자는 각각 ‘벽’과 ‘다리’를 상징했다. 결국 ‘다리’가 승리했고, 그건 영화의 중요한 메시지였다. “벽을 쌓을 것인가, 다리를 놓을 것인가?” 영화에 대한 평이 좋았던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 메시지에 공감한 것은 나만은 아니라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런데 데이비드 프라이의 《장벽의 문명사》를 보면 ‘벽’과 ‘다리’에 대해 ‘역사적으로’ 달리 생각하도록 한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비교를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장벽’은 평화를, ‘다리(교량)’은 전쟁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쌓으면서 이에 대한 반발로 “장벽이 아니라 다리를 놓아라.”(<블랙팬서>의 메시지와 동일하다)라는 표어가 등장했지만, 그 이전에 오랫동안“좋은 담장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라는 속담이 있었고, 트럼프 이전의 많은 대통령들(부시와 같은 공화당뿐만 아니라 클린턴, 오바마 같은 민주당의 대통령도)이 장벽 설치를 시도하고, 실행하고, 반대하지 않았다.

 

장벽은 대대로 문명의 상징과 같은 것이었다. 문명 바깥쪽, 이른바 이편에서 보기에 ‘야만’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막기 위한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조치였다. 그러한 방편은 전 인류사를 관통하고 있고, 전 지역을 망라하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래서 중국의 ‘만리장성’에 대해서, 중국이 어떻다 등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은 그 만리장성이 상징성을 갖고 있어서 그런 것이지, 중국이 특수하게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므로 상당히 부당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장벽들은 늘 파괴되었다. 벽 바깥(‘페일 너머’)의 민족들은 벽 안쪽의 문명으로부터 얻어내야 할 것이 있었으며, 거칠었고, 거침이 없었다. 반면 (벽 바깥쪽의 이들이 보기에) 벽 안쪽의 남자들은 여성들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싸움의 끝은 거의 일관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문명은 다시 ‘피와 벽돌로’ 벽을 쌓았고, 야만으로부터의 보호를 꾀했고, 어느 정도 유지하다(“장벽이 없었다면 중국의 학자도, 바빌로니아의 수학자도, 그리스의 철학자도 없었을 것이다.”), 또 파괴되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베를린 장벽은 오히려 너무 짧게 유지되었기에 유명해졌다. 지금도 최소 70개의 (물리적인) 장벽이 접경 지역을 가르고 있다고 한다. 그 장벽을 쌓은 국가는 장벽으로 이민의 흐름을 막았다는 자평을 하고 있으며, 고도의 기술을 쓴 이스라엘의 장벽을 본받기 위해서 각국에서 시찰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장벽이 무너지는 것은 역사적 법칙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오늘도 언제나처럼 장벽을 쌓고 있지만, 그 장벽은 언제나처럼 무너질 것이다. 계속 쌓아야 하는 것인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은 장벽이 평화를, 교량이 평화를 상징하는 시대는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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