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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Feb 13. 2021

26년 후, 한 가족의 일그러진 역사를 파헤치다

히가시노 게이고, 《옛날에 내가 죽은 집》


아주 미니멀한 구성이다. 물론 과거에 존재하는 인물들은 있지만 현재, 현실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단 두 명. 장소도 거의 버려진 나가노의 회색 집 한 곳으로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 단순한 구성으로도 한 편의 멋진 추리소설이 가능하다는 것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보여주고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많은 소설이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이 작품은 영화보다는 연극에 더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다.


이야기는 ‘나’에게 7년 전 헤어진 옛 애인이 전화가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고2 때부터 대학 시절 내내 사귀었던 그녀는 어느 날 문득 헤어지자고 했고, ‘나’는 거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녀가 전화를 걸고 만난 이유는, 통째로 사라진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 얘기였고, 돌아가선 아버지가 남긴 지도와 열쇠를 통해 그 기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 하루의 여행이 시작된다.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라는 제목 자체가, 사실은 많은 것을 짐작케 한다. 그녀, 사야카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는 ‘죽음’이 있을 것이고, 신분의 엇갈림이 있었을 것이라는. 그래서 추리소설에는 이런 식의 제목을 잘 짓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하가시노 게이고는 당당하게 많은 것을 내포하는 제목을 지어놓고 독자들과의 게임을 시도했다. 1994년 작품이니 대체로 초기에 해당하고, 아마 자신감이 넘쳤던 시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회성을 담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시기이므로, 이 소설에도 아동 학대라는 사회적 이슈가 되는 소재를 담기도 했다.


그들이 찾아간 회색 집은 어느 날인지 모르지만 11시 10분에 멈춰져 있었고, 그곳에서 발견한 일기와 편지, 그 밖의 것을 통해서 나와 사야카는 20여 년 전 한 가족의 일그러진 역사를 되살려낸다. 그 가족사 속에 나야카의 억압된 기억이 되살아나고.


이 소설에서 작중 화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탐정 갈릴레이’ 시리즈(대표적으로 《용의자 X의 헌신》)의 물리학 교수를 연상케 한다(전공도 물리학이다). 아직은 캐릭터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보이고, 어쩌면 이 작품을 거치면서 ‘탐정 갈릴레이’의 성격과 특징을 다듬어 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에서 ‘가가 형상’보다 ‘탐정 갈릴레이’가 더 끌리지만 《옛날에 내가 죽은 집》에서는 아직 그런 매력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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