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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Feb 16. 2021

냉장고가 바꾼 세상

헬렌 피빗, 《필요의 탄생》


집에 컬러 TV에 들어오는 장면은 기억에 선한데, 냉장고가 언제,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분명 아이스박스를 사용하던 기억은 있는데, 냉장고가 아이스박스를 대체하는 장면은 내 기억에 없다. 어느새 냉장고는 우리 집에 있었다. 어떤 사건이 아니었던 셈일까?


21세기 현대인에게 냉장고는 그냥 풍경 같은 거다. 거기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 그게 없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것. 그런데 생각해보면 대단히 인위적인 물건이다. 주변의 온도를 거스르고 무언가를 차갑게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게 냉장고다. 어쩌면 자연의 질서를 애써 거스르는 물건이 그 존재 자체에 대해 별로 의심하지 않게 만든 셈이다. 그만큼 우리 삶에서 필수적이라는 의미다.


냉장고의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아주 오래되었다고도, 아주 근래의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는 얼음이라는 걸 알았고(물론 그것을 알 수 있는 지역에 사는 사람에 한해서), 그것으로 음식물의 부패를 막을 수 있다는 것도 곧 깨달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얼음은 귀한 존재였다. 얼음이 생기는 것은 자연의 이치였지만, 어느 시대부터는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냉장고가 탄생하기 전에는 채빙(採氷)해서 파는 사업이 유망 사업이기도 했다.


아이스박스를 거쳐 냉장고가 나왔다. 열역학의 승리였다. 물론 헬렌 피빗이 지적하듯이 “기술 계통 종사자들은 근간에 깔린 과학 지식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고 반대로 열역학 분야를 탐구하던 과학자들은 새로운 지식의 잠재적 효용성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51쪽) 어쨌든 냉장고는 열역학의 발달에 힘입어 발명되었다. 그런데 냉장고가 발명되자마자 처음부터 환호를 받았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론 박람회 등에서 관심을 받기도 했지만, 기술적인 문제도 있었고(냉각의 정도라든가 기계의 크기 문제 등), 사람들의 인식도 모두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특히 미국의 반응은 놀랍게도 마냥 사냥이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던 지역임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고리의 발명품이 등장했을 때 그런 실험이 ”자연법칙을 어기고“ 신의 뜻을 거스른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내과 의사였던 고리는 환자들의 열을 다스릴 목적으로 제빙기를 만들었으나 사람들은 ”신이 창조한 얼음“을 잘라 쓰는 행위와 인위적으로 얼음을 만드는 행위를 완전히 다른 문제로 생각했다.” (63쪽)


그러나 냉장고를 만든 기업들은 냉장고의 필요성을 적극 홍보했고, 사람들은 그 필요에 호응했다. 처음에는 냉장고의 사용법도 익숙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금세 적응했을 것이다(어려운 일 아니지 않은가?). 그 적응은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도 가져왔고, 인류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이전 같으면 매일매일 식자재를 구입하고 준비해야 했겠지만, 이제는 주 단위로, 아니 몇 주 단위를 식자재를 구입하고 냉장고에 두었다고 사용한다. 그렇게 해서 음식의 종류도, 식습관도 바꾸게 되었다. 음식을 조리하는 기기의 변화보다 우리의 식문화를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바로 냉장고였다. 헬렌 피빗은 역설적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만약 냉장고가 더 일찍 발명되었더라면 베이컨, 체더치즈, 훈제 청어, 건포도, 잼처럼 우리가 익히 아는 보존식품은 아예 세상에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212쪽)


헬렌 피빗의 《필요의 탄생》은 냉장고의 과학이라기보다는 냉장고의 역사와 사회문화를 다룬다. 그것이 탄생시킨 삶의 필요를 이야기한다. 냉장고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더 편리해졌을 수도 있고, 또 불편해졌을 수도 있다. 더 건강해졌을 수도 있고, 지구에서의 삶이 위협받고 있기도 하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절대 냉장고 이전으로 다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미래만이 있다. 그 미래가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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