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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Feb 23. 2021

움베르토 에코의 유동 사회에 대한 성찰

움베르토 에코의 유동 사회에 대한 성찰


움베르토 에코는 1985년 3월부터 2015년까지 이탈리아의 시사잡지 《레스프레소 L’Espresso》에 “미네르바 성냥갑”이라는 난에 칼럼을 연재했다(‘미네르바 성냥갑’이라는 이름은 미네르바 회사에서 만든 작은 접이식 성냥갑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 성냥갑 안쪽에 간단하게 메모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에코는 거기에 칼럼에 쓸 글에 대한 단상이나 착상을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2000년부터 2015년 사이에 쓴 400편이 넘는 칼럼 중 ‘유동 사회’라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성찰로 이해될 수 있는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이전에 낸 책들은 국내에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과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등의 제목으로 나왔다).


그렇다면 ‘유동 사회(Liquid Society)’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책을 옮긴 박종대는 이 용어가 이전에는 ‘액체 사회’, ‘액체 근대’ 등으로 번역되었다면서, 자신은 어감이나 맥락상 ‘유동 사회’가 더 어울리는 번역이라고 쓰고 있다.) 유동 사회란, 공동체 개념의 위기, 흔들리는 근대의 근간, 확고한 기준점의 결여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다. 이로 인해 ‘모든 것이 어느 정도씩 유동하는 상황’이 생겼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법에 대한 믿음을 잃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의 눈에 띄는 것이 기준점 없는 개인의 유일한 해결책이 되었다. 돈으로 자신을 드려내는 행태, 소비주의, 무절제한 소배 행태가 그런 것들에 속한다.” (14쪽) 에코는 바로 이러한 사회의 여러 면을 날카롭게 들여다보고 있으며, 이러한 사회에 대해 풍자와 함께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그의 풍자는 날카롭다. 중심을 잃고, 지성을 버리는 사회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러나 그의 날카로움은 벼린 칼처럼 사회를 난도질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연대하며 서로 기대며 살아가기 위한 전제로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고민하는 과정이 바로 그의 풍자고 비판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인터넷 세상, 스마트폰의 세상에 대해서도 비판하는데, 그 스스로 그 방향을 돌려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 과잉의 시대에 대해 교육과 시민의식과 같은 것을 강조하면서 어떻게 하면 인터넷에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중심을 찾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의 고민이 그다지 효과가 없음을 우리는 지금 확인할 수 있지만, 그래도, 아니 그래서 그의 고민이 여전히 유효하다.


이 칼럼집에서도 그가 여전히 책에 대해 희망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부의 열 꼭지가 넘는 글이 모두 책에 대한 얘기다. 필체에 대해, 저장 매체에 대해, 소설과 현실에 대해 어쩌면 지금은 이미 결판이 난 듯한 주제들을 다시 꺼내어 생각해보도록 하고 있다. 컴퓨터 자판에 의존해서 글을 쓰는 시대에 무슨 필체가 의미가 있으며, 저장 매체로서 USB를 넘어서 클라우드로 넘어간 시대에 책이라는 저장 매체의 우수성을 얘기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으로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말을 타기도 하고, 범선 항해를 즐기고, 트래킹을 떠나고, 우표 수집을 하는 것처럼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으며, 새로운 저장매체의 수명이 확인되지 않은 마당에 이미 증명이 된 저장매체인 책에 대한 얘기는 어쩌면 아주 사소한 얘기일 수 있으나, 그런 것으로도 애써 중심을 잡고자 하는 에코의 안간힘을 우리는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에코의 새로운 글을 읽지 못한다. 시간이 갈수록 더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책의 글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새로워질 수도 있다. 그의 예측이, 그의 혜안이 옳았다는 것에 감탄할 즈음엔 이미 늦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의 글들은 소중히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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