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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Apr 09. 2021

김옥균과 홍종우, 그들의 엇갈린 삶

정명섭, 《그래서 나는 조선을 버렸다》


갑신정변의 풍운아 김옥균. 그 김옥균을 저격한 홍종우.

위대한 선각자 혹은 친일 모험가라는 양극단의 평가를 받아온 김옥균과는 달리, 홍종우는 삶의 궤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출세를 위해 민씨 일파의 사주를 받은 수구파로 낙인찍혀 있다. 사실 김옥균에 대한 평가도 극과 극 사이를 오가는 것도 그의 행적이 그리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력 집안에서 태어난 명민했던 청년은 정변을 일으켰다 실패했고, 또 한 청년은 그를 쏘았다. 그들의 삶은 어디서 엇갈렸을까? 그 둘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어느 정도나 타당한 것일까?

 

정명섭은 두 풍운아의 삶을 엇갈리면서 그려내고 있지만, 더 오래 살아남았다는 이유와 함께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이유, 그리고 너무 편향적으로 평가되고 있다는 이유로 홍종우에 다소 방점을 두고 있다. 홍종우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몰락한 양반 가문에 태어난 홍종우가 일본을 거쳐 프랑스에 발을 딛은 최초의 조선인이라는 것부터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다. 그를 수구파와 개화파 중 굳이 어느 한쪽에 세운다면 개화파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가 아니었고, 이른바 왕당파였다. 임금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한 인물이었다. 비록 출세에 대한 생각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자신의 출세만을 위했다면 신조 없이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했겠지만 그의 행동에는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었다. 말하자면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정명섭이 평가하기를, 그가 김옥균을 저격한 이유도 그가 꾸었던 조선의 미래가 김옥균과는 달랐기 때문이었다.

 

홍종우에 대한 정명섭의 인식을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를 오로지 김옥균을 암살한 순간의 인물만으로 인식하고, 김옥균을 암살하기 전과 암살한 이후의 삶을 지워버리는 것은 구한말의 파란만장한 역사의 많은 부분을 지워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김옥균을 암살하기 전 프랑스에서는 《춘향전》과 《심청전》을 번역해서 소개하였고, 김옥균을 암살한 이후, 조선 정부로부터 환영을 받았고(아니 그렇겠는가. 당시 조정의 입장에선 김옥균이 대역죄인이었으니) 고종의 측근으로서 활동하면서 적지 않은 활동을 한 것이 바로 홍종우였다. 친러파로 시선을 받기도 했고, 황국협회를 이끌며 독립협회가 격렬히 대립하기도 했다.

 

시대에 따라 김옥균과 홍종우에 대한 평가는 극명히 달라져 왔다. 김옥균은 대역죄인이었다. 그를 따랐거나 관계가 있던 많은 인물들이 처형당했다(살아남아 망명의 길을 떠났던 인물들은 오히려 갑신정변의 중심인물들이었고, 그들 중 몇몇은 금위환향하기도 했다). 갑신정변 10년 후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는 조선 정부의 충신이었고, 고종을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확실해지면서 김옥균은 선각자로 평가받기 시작했다(김옥균의 죽음에는 일본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음에도. 일본 정부는 김옥균 살해 정보를 입수했음에도 김옥균에게 알리지 않았다). 홍종우는 그런 선각자를 죽인 출세주의자이자 수구파로 전락해버렸다. 오랜 동안 그런 평가가 이어졌지만, 다시 시대가 변하면서 김옥균을 친일파로서 바라보는 이들도 생겼다.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편향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들 삶의 궤도, 의도를 모두 파악할 수 없을뿐더러, 그것을 알더라도 그것을 평가하는 시각도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다만 두 풍운아의 삶과 비켜나가면서, 어느 시도도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은 나라가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아니다. 겨우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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