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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May 17. 2021

액자에 대한 예리하고 따뜻한 시선

이지은, 《액자》


미술 작품을 보면서 액자를 눈여겨본 적이 있을까? 책장에 꽂혀 있는 미술 관련 책들을 뒤져봐도 그림 사진에는 액자가 거의 없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모든 그림은 액자가 감싸고 있을 게 분명하지만, 액자는 우리가 미술을 감상하는 데 그다지 필요 없는 장식으로 여겨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지은은 바로 그 액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액자에 대해서 얼마나 재미있고, 혹은 의미 있는 얘기가 있을까 싶었다. 액자에 관한 연대기적 서술이나, 혹은 액자 만드는 법 같은 지루한 얘기가 이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했다. 물론 《귀족의 시대 탐미의 발견》과 《부르주아의 시대 근대의 발명》의 이지은이니 절대 그러지 않을 거란 믿음도 있었지만.


그래서 읽었는데... 역시였다. 역시 이지은이었고, 액자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얘기들은 다양하고, 의미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액자를 두고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들을 포함해서. 이를테면 카몽도 백작과 얽힌 드가의 액자 이야기 같은 얘기.


이지은은 액자를 “그림 속 세계와 그림 밖의 세계를 구분 짓고 그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사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미술사가들도 액자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액자가 미술 작품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또는 작품을 돋보이게도 하는 것에 비하면 과거부터 액자는 그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조연, 혹은 단역에 불과했다. 이지은은 그 무시받는 액자를 다시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다양한 액자를 소개하고 있다. 켄트 제단화의 경우에는 제단화의 특징으로 말미암은 그림을 포함한 장식물로서의 액자를 이야기하고 있다(물론 그 장식물은 사라지고, 또 액자의 모습은 상상할 수 밖에 없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와 관련해서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액자’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메디치 가문에서 프랑스의 왕비가 된 마리 드 메디시스의 삶을 그린 24개의 그림을 담고 있는 액자가 바로 파리의 뤽상부르 궁전의 메디시스 갤러리 자체였으니 그렇다. 그리고는 바로 ‘가장 작고 값비싼 액자’ 이야기를 한다. 프랑스 왕의 (작은) 초상화를 담은 ‘브와트 포트레’다. 사람들은 그 작은 브로치 같은 것을 장식하고 있는 보석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지은은 그보다 그 안의 그림과 그것을 감싸고 있는 액자에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은 그 시대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우리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보는 명작의 화려한 액자가 그 당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의외이긴 하다. 이지은은 액자가 19세기 들어서 박물관이라는 제도, 혹은 장소가 탄생하면서 비로소 생겨난 것이라는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그 액자는 그림과 동시에 태어나지 않았다>에서). <모나리자>의 액자도 애초에는 어떤 것이었는지 모르고, 1911년에야 현재의 액자로 교체했다고 한다. 19세기 이후 그림이 권력가의 과시욕과 개인적인 만족의 도구에서 대중들이 감상하는 작품이 되어서야 액자가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고흐의 액자 이야기다. 고흐는 인상파 선배 화가들이 액자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처럼, 혹은 그보다도 더 액자의 색깔과 질감에 신경 썼다. 자신의 그린 그림의 색체를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고, 또 의미를 잘 나타낼 수 있는 액자가 어떤 것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고흐에게 액자의 색깔은 그림 바깥의 일개 장식이 아니라 착상 단계에서부터 그림과 함께 떠오르는 그림의 일부였다.” 223쪽).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그림’이 되기 위해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마다 자신의 그리는 그림 얘기에 액자 얘기를 보탰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고흐가 직접 만들고 색칠한 액자로 남아 있는 것이 단 하나라는 사실이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모과, 레몬, 배와 포도가 등장하는 정물화>란다. 더 안타까운 것은 재작년 반 고흐 미술관에 갔을 때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이지은의 《액자》는 그래서 결국 그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사물을 대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별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던 대상에 대한 저자의 예리한 시선이 느껴지는 책이기도 하고, 그 예리한 시선이 날카롭지 만은 않은, 그래서 따뜻함까지도 안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http://blog.yes24.com/document/14404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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