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러스 데일의『칼 폴라니, 왼편의 삶』
칼 폴라니를 잘 몰랐다. 아마 이름만큼은 읽었을른지 모른다. 하지만 스쳐갔을 것이고, 강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혹은 그 이름까지 기억하고, 염두에 둘 만큼 나의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이름은 낯설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칼 폴라니라는 이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역사와 경제에 대한 설명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듯이. 마치 시대가 그를 불러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칼 폴라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야 했다.
그는 헝가리 태생의 유대인이었다. 헝가리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헝가리라는 한 나라에 매몰되어 세상을 보지 않았고, 오히려 영국을 그리워했으며, 미국에 희망을 걸기도 했다. 또한 유대인으로서 자각도 별로 없었으며, 오히려 기독교도였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지 않고, 기도도 드리지 않는 기독교 신자였다. 제목에서 보듯이 그는 분명 ‘좌파’였다. 평생 ‘왼쪽’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시장 경제를 비판했다.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전환’ 이후 인간과 자연이 상품화되어 버렸고 시장만능주의가 도래했다고 주장했다. 이 시장경제의 자본주의는 인간을 소외시키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으며, 대신 비(非)시장의 여러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분명 사회주의를 옹호하고 그 시대가 오기를 갈망했지만, 그가 얘기한 사회주의는 지금 흔하고, 쉽게 얘기하는 사회주의와는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사회민주주의와도 다른, 말하자면 길드 사회주의, 혹은 노동조합 사회주의라고 수식어를 붙여야 조금 더 정확해지는, 그런 사회주의였다. 그가 추구한 노선은 별로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고, 또 현대적이지 못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당대에 대한 그의 분석은 종종 빗나갔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조금 때 지난 좌파의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또 선명성이 각광받는 냉전의 시대에 더더욱 그의 이름을 불리워지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그의 이름이 다시 소환되고 있을까? 이미 50년도 더 전에 세상을 떠난 인물을.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의 홍기빈 소장은 바로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인간의 합리성에(만) 기초를 둔 현재의 경제학이 놓치고 있는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통합성’에 관한 인식이 필요한데, 바로 칼 폴라니가 그것을 지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칼 폴라니는 개인의 관점을 넘어서 대중의 관점에서, 평화와 공존을 꿈꾸는 인류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았다는 것이다.
개러스 데일의 칼 폴라니 평전은 칼 폴라니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따라가면서 그의 사상적 편력과 함께 인간 관계, 정치적 부침 등을 세밀하게 적고 있다. 특히 그 시대와 관련한 다양한 정치가, 경제학자, 사회학자의 관점을 덧붙이면서 칼 폴라니가 그에 대한 어떤 대응을 했는지를 자세하게 덧붙이고 있다. 단지 칼 폴라니의 주장만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그가 방대한 이론적, 실천적 흐름 속에 어떤 위치를 점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인물들의 사상을 이해하고, 그 관계를 파악해야 해서 그렇게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그렇다고 난해한 책도 아니지만). 칼 폴라니의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어느 정도는 그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갖추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어서 칼 폴라니의 주장이 명료하게 이해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의 이론과 비전도 조금은 선명해진다. 그는 편협함을 반대했으며, 파시즘을 거부했으며, 공존을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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