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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Jun 02. 2021

걷는다는 것

토르비에른 에켈룬, 《두 발의 고독》


노르웨이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토르비에른 에켈룬은 어느 날 한 저자와의 인터뷰 도중 갑자기 쓰러진다. 병원에서 깨어난 그는 뇌전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변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운전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운전면허증은 취소되고, 그는 이제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걷기에 관해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또렷하다. 내가 살던 마을은 성산포였다(바로 그 제주도, 일출봉이 있는). 할머니가 사시는 마을, 즉 아버지와 어머니가 태어나고, 자라고, 지금도 친척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성산포에서 한라산 쪽으로 올라간 마을(수산리)이었다. 성산포에서 가려면 두 개의 마을을 지나야 했다. 초등학교(당시에는 초등학교였지만)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친구와 함께 할머니 댁에 같이 다녀오는데, 고스란히 걸어갔었다(지금 지도로 보면 8, 9km 정도 되는 거리다). 성산포에서 나오는 길에는 좁은 길목 양 옆의 꽃들을 보고, 돌을 차며 걸었고, 수산으로 들어가는 길에서는 양 쪽의 귤 과수원마다 들러 하나씩 따 먹었다. 지금이야 거의 범죄 행위에 가까운 일이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감시하지 않았고, 또 그걸 뭐라 하는 이도 없었다. 할머니는 집 뒤편의 낑깡나무에서 딴 낑깡을 봉지 2개에 나눠 주셨다. 돌아올 때는 한 시간에 한 대 오는 차를 타고 나와서 다시 성산포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지만, 우리들은 그 거리를 용감하게(!) 걸어갔던 추억을 오랫동안 얘기했었다.


걷는다는 것은 특별한 행위다. 두 발로 걷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만 진화된 구조이자, 행동이다. 인간만이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길을 만든다. 또 다른 의도 없이 걷는 것만으로 목적으로 걷기도 한다. 걷는 것의 의미가 인간에게 와서야 생존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서 점점 걷지 않는다. 걷는 것은 분명 이동의 방편으로 시작되었음에도 이제 우리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을 목적으로 걷기를 거의 선택하지 않는다. 네비게이션의 지시를 받으며 자동차를 통해 이동해 버린다. 중간의 풍경은 단순한 과정에 불과하고, 우리에겐 출발과 도착 지점만 남는다. 비행기도, 기차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부러 걷기를 선택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의 산티아고 길을 걷고, 빌 브라이슨처럼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걷는다. 또 제주도의 올레길을 찾고, 전국 곳곳에 생긴 이러저러한 명칭의 길을 걷는다. 그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길을 걷는 것 자체, 걸으면서 이야기하고, 바라보고, 또 생각하는 것을 목적으로 사람들은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아간다(아이러니한 것은 그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아가기 위해 중간 과정이 생략된 이동 수단을 이용한다는 점이긴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그런 걷기를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고. 아무런 생각 없이 걷는 것도 의미가 있었고, 걷는 도중 떠오르는 아이디어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도 한다. 우리는 걷는 것의 의미를 진화적 의미를 넘어서서 창조해내고 있다.


토르비에른 에켈룬은 걷는다. 어린 시절의 길, 노르웨이 숲의 길 등등. 혼자서 걷기도 하고, 어린 시절의 친구와 걷기도 하고, 또 자신의 어린 자식들과 걷기도 한다. 그렇게 걸으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했다. 생각들은 시간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삶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과거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현재와 미래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저 단순하게 내 몸의 고통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홀로 걷든, 누구와 함께 걷든,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바로 걷기를 통해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홀로 살아가고 있지만, 또한 혼자서 살아가지 않는다는 깨달음. 고독하지만, 또한 그 고독을 이겨낼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깨달음. 걸으면 그런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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