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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Jun 12. 2021

욕망하는 영웅들

안인희, 《북유럽 신화 3》

2권에서 라그나뢰크로 최후의 전쟁까지 치르고, 이후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음을 보여줬는데 3권에서는 무슨 얘기가 남았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1권, 2권은 거의 신들과 거인들의 이야기였다. 북유럽 신화가 상정하고 있는 아홉 계의 세계에서 하나 차지하고 있는 인간들의 세계, 즉 중간계의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다. 3권은 그 인간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냥 평범한 인간들의 이야기라면 신화가 아닐 터, 바로 영웅들이 3권의 주인공이다. 


어디서나 영웅들의 모험담을 읽으면 신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느낌으로 불만스럽기도 하다. 북유럽 신화에서도 당연히 그렇다. 이를테면 ‘반지의 영웅’ 지구르트만 해도, 난쟁이 밑에서 자라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온갖 모험을 겪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깨워 사랑하고, 그리고 최후를 맞이하는데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읽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지만, 그 주변의 인물들은 오로지 그의 영웅됨을 위해 희생되고 있다. 모든 영웅담은 그런 구조다. 그건 영화를 비롯한 영웅 이야기에서도 그렇다. 그런 구조라 환호를 받고, 또 비판을 받는다. 상징 속에 교훈이 담겨져 있고, 반복되어 읽히면서 그것이 사람들의 뇌리 속에 박히는 것은 신화의 교육적 요소이긴 하지만, 그와 함께 영웅 중심의 서사가 가지는 반교육적 요소도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런 평론가적인 시각을 거두고도 북유럽 신화의 영웅 이야기를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잘은 몰랐지만, 이름은 들어본 영웅들이 등장한다. 1권, 2권에서 소개했던 지구르트가 있고(사실 2권 이야기의 반복이다), 베오울프가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시대 이후에 등장하는 영웅인 ‘성배의 기사’ 파르치팔과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이 있고, 열렬한 사랑 이야기로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야기도 있다(사실 3권은 바로 이들의 이야기가 전부이기도 하다). 


이렇게 영웅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왜 이들의 이야기가 현대에 영화의 소재로 활용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일단 그들의 모험은 화려하다. 용이 등장하고(동양의 용과는 달리 서양의 용은 거의 ‘악(惡)’의 상징이다), 공주를 둘러싼 기사 사시의 대결이 있고, 기구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좌충우돌의 측면이 있고, 이유도 매우 단순하지만(아버지의 복수, 아니면 그냥 기사라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상력을 더할 수 있고, 그래서 다양한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자양분이 되는 것이다. 지구르트의 반지만 하더라도 현대의 영상 문화에서 ‘반지’가 등장하는 다양한 예들을 보면 모두 거기서 분화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영웅들의 이야기는 성장 소설이기도 한데, 그런 면에 가장 뚜렷한 것은 파르치팔이다. 위대한 기사의 아들이지만,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세상과 단절시켜 키운 탓에 바보 소년으로 자란 게 파르치팔이다. 하지만 그러나 세상에 대한 동경은 본능과 같은 것이었고, 세상으로 나아가면서는 그야말로 좌충우돌이었다.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여자로부터 물건을 빼앗고, 기사와 싸우고, 불쌍한 사람 앞에서 왜 그렇게 되었는지 질문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은 그런 잘못을 깨닫고, 당당한 ‘성배의 기사’, ‘성배의 왕’이 된다. 이런 성장 이야기는 사실 모든 영웅 이야기의 표본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하다. 그렇다고 시시하다고 물려버리는 이야기가 아니란 점이 중요하다. 우리는 늘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내면서, 들으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많은 문화에 이런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런 이야기의 다양한 유용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다양한 유용성 가운데 으뜸은 물론 재미다. 북유럽 신화의 영웅들의 이야기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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