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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Jun 18. 2021

인간의 악(惡)함에 대한 가차 없는 폭로

정유정, ≪완전한 행복≫

정유정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 언급하는 대로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가 서 있던 장소. 그곳은 내 부모님이 사는 집의 바로 옆 건물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더 오싹거렸다. 그게 그 사건의 엽기스러움과 상관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각인의 효과는 분명했다. 자꾸 이러저런 장면과 오버랩되는...


≪종의 기원≫을 처음 읽었을 때 뭔가에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아니 이렇게 끝나다니... 마지막 페이지를 두고 한참 멍한 채로 있다 이 작가에게 뭔가가 있다고 느꼈다(그 비슷한 시기에 박지리의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읽었었다). 인간에 대한 시각이 그런 경우야 흔하게 보지만, 그걸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이전의 작품 ≪7년의 밤≫과 ≪28≫을 읽었다. 나의 느낌은 더 강화되었다. 정유정이라는 작가가 디디고 서 있는 위치가 독보적이라는 데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진이, 지니≫에서 다소 누그러졌던(그래서 조금은 실망했던) 그의 작품 세계는 ≪완전한 행복≫에서 다시 돌아왔다. 인간의 악함에 대한 가차 없는 폭로!


세 사람의 입과 생각을 빌어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엄마인 유나를 거의 신적으로 맹종하는 딸 지유, 유나의 행성으로 살아갈 만큼 푹 빠져 재혼한 차은호, 그리고 유나와는 인연을 끊고 살아가는 유나의 언니 신재인. 이들은 신유나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가차 없이 제거하는 과정을 증언한다. 아니, 그들은 몰랐다. 신유나라는 사이코패스, 혹은 나르시시스트의 행복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래서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그의 자기장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였다. 자신들은 신유나의 행복을 위한 부수적인 존재로서만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이미 행복에서 이미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야 알 수 있었을 뿐. 그것도 아주 늦게.


작가는 주인공이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완전한 행복’이란 그 자체로 형용 모순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완전함을 추구하는 게 행복으로 이어질 수 없다. 또한 행복은 완전해질 수도 없다. 행복은 무언가 모자라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 모자람을 인정했을 때,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걸 자각했을 때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도 깨달을 수 있다. 행복에 집착하지 않을 때 행복해질 수 있다. 소설을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대해 가차 없이 폭로하지만, 그 폭로가 또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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