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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Jun 17. 2021

실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 《총보다 강한 실》


인류가 언제부터 옷을 입기 시작했는지를 이(lice)에 대한 계통학적 연구를 통해서 밝혀냈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을 때 무척 탄복했던 기억이 있다(이 책에도 소개하고 있다). 사람에게 기생해서 사는 이에는 몸니와 머릿니 두 종류가 있는데, 몸니는 옷에 사는 종류다. 그러니까 옷이란 게 있어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두 종류의 이가 언제 분화되었는지를 조사하면 인류가 옷을 입기 시작한 시기를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분석에 따르면 42,000년에서 72,000년 전 사이 어느 시점에 인류가 옷을 입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금 시간 간격이 넓긴 하지만, 내가 탄복했던 건 언제부터 옷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연대를 알아낸 것보다 그런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정말 옷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그 형태는 어땠는지 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이들이 있다.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가 그중 한 사람인데, 그는 구체적으로 ‘실(thread)’의 역사를 쫓아가고 있다. 실에 관한 책이 어떤 게 있나, 아니면 실에 대해서 깊게 다룬 책을 읽어보았으나 가만히 생각해보았으나 떠오르는 게 없다. 면화에 대해 다룬 책도 있고, 비단을 통한 무역을 다룬 책도 있는데, 정작 그런 책도 ‘실’까지 올라가거나, 내려가지 않았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인류에게 이만큼 중요한 게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이른바 의식주에서도 가장 먼저 두는 게 입는 것이고, 그 입는 것을 가능케 하는 게 바로 실이니 말이다. 그러니 실을 통해서, 그리고 그 실을 통해 만들어진 옷을 통해서 역사를 재구성하는 게 무척이나 흥미로울 것인데, 그러나 그런 책은 흔하지 않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주 오래 전의 ‘실’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 전의 물건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려면 일단 썩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의 합성섬유와는 달랐던 과거의 실은 이른바 썩기 좋은 유기물질이었다. 그래서 실로 과거를 알아내는 것이 힘들었고, 그래서 실을 통해서 역사를 읽고 쓰는 것이 그리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는 그런 어려움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를 잊게 할 정도로 깔끔하게 실에 관한 역사를 짜서 펼치고 있다. 13가지 큰 주제는 제목만 봐도 흥미롭다. 옷감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이집트의 미라를 감쌌던 리넨에 대해서, 비단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전파되었는지, 바이킹이 배에 달았던 모직 돛에 대해서, 중세 영국의 양모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지. 그리고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소개하면서는 레이스와 사치의 관계를 다루고, 면화에 대한 장에서는 노예 제도의 비참함에 대해서 쓰고 있다. 에베레스트 등반과 남극 정복에 관한 얘기를 통해서는 극한 상황에서 필요한 옷감에 대해서, 레이온이라는 새로운 옷감을 통해서는 근대 이후 공장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서 조명을 비추고 있다. 현대로 넘어와서는 혁신적인 ‘실’, 혹은 옷감에 대해서 다루는데, 바로 우주복, 수많은 신기록을 양산해낸 수영복을 비롯한 스포츠의류, 그리고 거미줄을 이용해서 옷감을 만들려고 하는 시도 등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저자는 또 쪼개고 있는데, 하나의 이야기를 몇 페이지로 나누고 있다. 그 나누어진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어내고 있는 것 자체가 어쩌면 실로 옷감을 만들고, 옷을 만드는 과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장면과고 같은 이야기들이지만, 그 장면들이 모여서 흐름이 되고, 또 그 흐름들이 역사를 이룬다.


실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다. 그리고 그것은 진보의 역사이기도 하고, 또 불평등과 착취의 역사이기도 하다. 실을 통해서 보는 역사가 다른 것을 통해서 보는 역사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은 신기하기도 하지만 또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실이라고, 옷이라고 다른 역사를 만들어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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