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A Jun 24. 2021

인간의 본성은 이토록 허약하고 이기적인가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어울리지 않게 ‘눈’의 진화에 관한 논쟁이 떠올랐다. 이른바 창조론자, 내지는 창조과학에서는 눈이라는 기관의 복잡성을 얘기하면서 이러한 기관이 점진적인 변이가 쌓여서 만들어졌을 거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1%의 눈이 무슨 소용이라며.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 등 많은 생물학자들이 논파하듯이 1%의 눈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보다, 10%의 눈은 1%의 눈보다 살아가는 데 어마어마하게 유리하다. 더군다나 우리의 눈은 생각보다 그렇게 완벽하지 않다. 눈이라는 기관을 하느님이 공을 들여 만들었다면 지금처럼 만들지 않았을 거다.


전혀 과학과는 관련이 없는 소설이지만(그래서 주제 사라마구는 백색 실명의 원인에 대해서 밝힐 필요도 없다), 눈의 진화에 대해 생각한 것은 난데없는 일은 아니다. ‘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기 위해 인간의 눈이 진화의 결과물, 아니 과정에 있는 거라는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진화적 성과가 한 순간에, 이유도 없이 무너져 내렸을 때, 그건 ‘인간’이 될 수 없었다. ‘인간’이라는 굵은 글씨로 밑줄까지 그어가며 말해야 하는 인간이 가지는 많은 숭고한 가치들은 겨우 하나의 기관, 눈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그나마 한 집단이 치욕을 견뎌가며 인간이라는 조건에 가까스로 걸맞는 마음을 가지고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은, 한 사람이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본다는 것이란... 대단한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당연히 인간의 본성에 대해 쓰고자 했을 것이다. 그것은 허약한 것이고, 이기적인 것이다. 문명과 야만 사이는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그걸 읽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총을 든 자들이 식량을 독식하고 굴종을 강요하고, 파렴치한 요구를 했을 때, 어찌 할 것인가? 그들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혹은 내가 총을 지니고 있다면 과연 자애로운 판단을 하여 나눌 수 있을까?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도 의미가 없다. 인간이 그러기 쉽지 않다는 걸 주제 사라마구는 냉철하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어슐러 K. 르 귄(《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에게서 이미 들었듯이 주제 사라마구의 글은 형식적으로 그리 친절하지 않다. 한 문단이 몇 페이지에 이르거나, 대화와 지문이 줄로 나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이 소설이 쉽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그냥 글을 쫓아가면 다다를 수 있는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 계속 생각하게 하고, 계속 찾아야만 하게 한다. 그게 정신적으로 피곤하게 하면서, 또한 성취를 느끼게 한다.


사람들은 다시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을 때 유일하게 볼 수 있었던 여인은 볼 수 없게 된다. 그녀가 볼 수 있던 동안 망가진 세상을 계속 보게 한다는 것이 오히려 처참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작가의 이전글 삶의 한 지점을 응시하는 섬세한 문장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