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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Jun 29. 2021

인간, 천사 같기도, 악마 같기도

리처드 랭엄, 《한없이 사악하고 더없이 관대한》


두 개의 세계가 있다. 루소의 세계와 홉스의 세계. 혹은 보노보의 세계와 침팬지의 세계. 한쪽엔 더없이 관대한 품성의 인간이 있고, 다른 한쪽엔 한없이 사악한 존재가 있다. 루소주의자들은 도덕적이고, 선한 인간이 점점 타락해왔다고 하고, 홉스주의자는 본성이 악한 존재가 교육 등을 통해 다듬어져 왔다고 한다. 이러한 인간 본성에 대한 관점은 대단히 역설적이다. 어느 쪽이나 증거를 가지고 하는 이야기일 텐데 너무나 다른 인간,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선한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과 악한 인간이 나아졌다는 것은 결국 한 지점으로 수렴했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똑같은 인간을 보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하버드의 인간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랭엄은 이 두 개의 세계가 비록 역설적이지만 모순적이지는 않다고 본다. 인간은 두 가지 성향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또한 어느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진화했다고 보지 않는다. 관대한 품성이나 사악함이나 모두 호모 사피엔스로서 진화시켜 온 것이라고 본다.


어떻게 두 가지를 모두 진화시킬 수 있었는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랭엄은 인간, 내지는 동물의 공격성, 혹은 폭력성을 두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즉, ‘주도적 공격(냉기, 공격적, 사전에 계획한)’과 ‘반응적 공격(온기, 방어적, 충동적인)’이 그것이다. 괄호에 넣었듯이 반응적 공격은 누가 나를 자극했을 때 욱하면서 나오는 공격성이고, 주도적 공격은 계획적인 살인과 같은 것이다. 랭엄은 다른 동물에서도 주도적 공격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야말로 거의 유일하게 주도적 반응적 공격성보다 주도적 공격성이 우세한 종(種)이라고 한다. 바로 여기에 선함과 악함의 역설을 풀 수 있는 해답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인간은 ‘자기 길들이기(self-domestication)’를 통해서 폭력적 성향을 누그러뜨려 왔다. 길들이기의 결과는 대표적으로 개의 가축화에서 알 수 있다. 또한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실험한(지금도 진행 중인) 은빛 여우의 길들이기에서도 길들이기가 가져오는 여러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두뇌 등을 비롯하여 많은 외형적 특징은 인간이 자기 길들이기(개는 인간이 길들인 것인지만, 인간은 길들이는 주체가 스스로라는 의미에서 자기 길들이기이다)를 통해 유형 성숙한 것이고, 또한 품성 역시 길들이기의 효과로 반응적 공격성이 약화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인간의 폭력성이 감소한 데 대해 랭엄은 (아주 놀랍게도) ‘사형 가설’을 내세운다. 찰스 다윈도 이런 얘기를 했다는데, 사회적으로 폭력적인 성향을 지니는 알파 남성을 제거하는 데 사형이라는 수단이 행해졌고, 이를 통해서 인간은 협력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고, 또 유순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 이 책 전체를 통해서 어쩌면 가장 논쟁적인 부분일 수도 있는데, 가장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서 가장 비폭력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럴까 싶기도 한 대목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이 사형제도에 대한 찬성의 한 논리로서 이용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랭엄도 이 부분이 가장 걱정이 되었는지 ‘에필로그’에 따로 이에 대해 쓰고 있다. 그는 사형 반대론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형이 한 일에 대해 감사할 수는 있지만, 이제는 그 단계를 지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에게서 반응적 공격성이 감소하면서 주도적 공격성은 강화되었는데, 여기에는 언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당연한 생각인데,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면 서로 작당해서 우세한 적을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다. ‘자기 길들이기’와 ‘반응적 공격성’의 약화, 그리고 그와 더불어 주도적, 협력적 공격성은 3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하면서 “언어를 기반으로 한 음모”가 핵심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천사 같은’ 그리고 ‘악마 같은’ 경향”은 언어에 의해 가능해진 셈이다.


인간은 모순된 존재다. 본성을 인식하고, 혹은 부정할 수 있는 (아마도 현재까지는) 유일한 존재다. 우리가 그러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즉시 오늘 밤의 살인 사건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는 없다. 또한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계획적 폭력 살인(이른바 전쟁 등)을 당장 없앨 수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어떤 길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서는 성찰할 수 있다. 그렇게 성찰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래도 좀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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