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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Jul 02. 2021

내부자이자 외부자가 분석한 일본의 굴레

태가트 머피, 《일본의 굴레》


일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놀랍도록 차갑게 분석한 이 책의 장점은 당연히 한국인을 의식하지 않았거니와 일본인도 의식하고 쓴 책도 아니라는 점이다. 거기에 더해 대학 졸업 후 40년이 넘게 일본에서 생활한 국제정치경제학자라는 점도 포함된다. 외국인이므로 어느 정도는 피상적인 이해에 그칠 수 있지만, 피상적 이해에 그치기에는 일본의 속살을 많이 경험한 이이면서, 또한 외국인으로서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위치라는 얘기다. 일본을 처음 겪으면서 가졌던 낯설음에 대한 당혹스러움이 애정으로 자라기도 하고,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일본 사회의 모순에 냉정해지는, 말하자면 내부자이자, 외부자인 셈이다.

 

이 책은 헤이안 시대부터 (이 책을 출판한 시점인) 2010년대 초반, 후쿠오카 대지진과 아베 시대까지를 조망한다. 그냥 일본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니 과거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식은 아니다. 지금의 모순된 일본 사회의 의식이 바로 그 과거에서 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서양인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천황-쇼군의 관계가 그것이다. 3차례에 걸친 막부 시대를 거치면서도 해소되지 않고,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누가 통치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속과 겉이 다를 수 밖에 없는 제도는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더욱 고착화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 태카트 머피의 일본 역사에 대한 시각이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천황제를 앞세우고, 또한 서양식의 의회 제도까지 갖추게 되었지만, 그것은 허구적인 것이었을 뿐, 하급 사무라이 출신으로 유신을 성공시킨 이들이 20세기에 들어서까지 생존하면서 막후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한 막후 정치 실세의 전통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초고도 경제성장을 이루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고나서도 이어졌는데, 다나카, 가네마루 신 등의 존재가 그것이다. 이러한 권력의 구조를 지닌 일본의 정치 체제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최종 책임의 소재가 없는 상태가 만들어져 버렸다. 태가트 머피는 현재의 일본의 문제가 먼 역사에서도 왔지만, 가깝게는 1930년대에서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일본은 바로 그 굴레에 매어 있다.

 

태카트 머피는 문화와 경제, 정치를 전방위적으로 고르게 분석하고 있다. 그는 일본 문화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특히 나라 시대, 교토 시대의 고급스러운 문화에 대해서 깊이 찬탄하고 있으며, 그런 문화가 근대, 현대에 오면서 변형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해 매우 아쉬워 한다. 경제에 대해서는 일본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경제 대국이 되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또 왜 1980년대 이후 ‘잃어버린 10, 20, 30년’이라는 말이 나올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다. 이 부분은 읽고 이해하기 결코 쉽지 않은 부분인데, 그래도 그들의 성공 전략을 우리도 거의 그대로 답습했다는 지적에 수긍할 수 밖에 없다. 정치 분야는 가장 신나게(?) 읽은 부분이다. 어렸을 적부터 들어온 일본 수상들의 이름이 순차적으로 등장하고,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등장하고, 또 사라졌는지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다. 이 분석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은 다나카와 오자와다. 우리 인식에는 일본 정계를 막후에서 구워 삶은 능구렁이 같은 인물로 다소 부정적으로 여기는데, 태카트 머피는 다소 결이 다르다. 특히 오자와에 대해서는 노련한 정치력을 바탕으로 일본의 정치를 정상화시키려다 좌절한 인물로 그리고 있으며, 앞으로 그런 인물이 나와야 한다는 의견도 내비친다.

 

이 책에서 어쩌면 가장 놀랍게 일게 되는 부분은 여기에 쓰고 있는 일본과 우리나라가 정말 많이 닮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극구 부인하지만, 태카드 머피는 여러 차례 일본과 한국이 정말 많이 비슷하다고 쓰고 있다. 어떤 부분은 완전히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관찰한 바를 쓰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 대목도 있다. 그만큼 (특히 외부의 시각에서 볼 때) 우리는 일본 사회와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또한 절대 섞이지 않는 지점도 찾을 수 있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바로 일본인들의 ‘피해자의식’이다. 지도자에서부터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거의 국민 모두가 그들은 피해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에 휩쓸려 간 것도 그렇고(그들은 원하지 않았다?), 핵폭탄에 의한 피해도, 이후 냉전 시대에도, 그리고 현대에도. 그러므로 누구도 잘못에 대한 최종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셈이다.

 

“No Japan”이라는 구호가 나온 지 2년이 되었다. 초기에는 납작 엎드리고 잘못했다고 빌라고 하던 이도 있었고, 또 반대편에서는 일본과의 절연을 선언하기도 했다. 2년이 지난 지금 어떤 이는 우리의 대응이 잘못되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그 동안의 성과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한다. 그래도 일본에 대한 감정적 반응에서 다소는 이성적 분석에 이르는 과정이 있었다고도 판단한다. 바꾸지 못하는 이웃. 그 이웃에 모진 시련을 당했고, 지금도 불편하기 그지없지만(물론 ‘불편’은 매우 수위를 낮춘 말임에 분명하다), 그래도 같이 살아가야 한다. 왜 그러는지 냉철히 이해하고, 또 분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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