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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Jul 23. 2021

중세의 상징

미셸 파스투로, 《서양 중세 상징사》

미셸 파스투로는 색에 관한 책들로 먼저 만났고(《색의 비밀》, 《우리 기억 속의 색》, 《파랑의 역사》), 중세 유럽의 상징에 관한 책들로도 만났다(《곰, 몰락한 왕의 역사》, 《돼지에게 살해된 왕》). 색에 관한 책도 주로 그 색들이 의미했던 바, 즉 상징에 대해서, 그 상징이 시대에 따라서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서양 중세 상징사》는 그런 여러 상징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는 우선 우리의 관점에서는 전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중세 사람들에게는 아주 합리적이고 당연한 것이었다고 쓰고 있다. 즉, “모든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는 전제에서 서양 중세의 여러 상징들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중세 사람들도 생각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일뿐더러 상징을 통해 중세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시도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대표적으로 보자면, 파란색의 경우 우리는 차가운 색이라고 여기지만 중세에는 따뜻한 색이라고 봤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 상징들의 역사를 기술한다. 우선 동물과 식물이다. 《곰, 몰락한 왕의 역사》와 《돼지에게 살해된 왕》에서 자세히 기술하기도 했었는데, 여기서는 곰보다도 사자에 더 관심을 둔다. 곰이 어떻게 사자로 대체되었는지에 대한 탐구다. 그리고 멧돼지가 부정한 동물로 타락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다룬다. 그리고 동물 재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이것이야말로 현대인 생각하기에 어처구니없는 짓이지만, 중세 사람들에게는 매우 ‘바람직한 정의’의 실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무와 꽃에 대해서도 다루는데, 특히 꽃 중에서도 백합꽃(중세 프랑스 왕가의 상징이었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룬다.


다음으로 다루는 것은 ‘색’이다. 색의 역사에 관한 대가답게 미셸 파스투로는 이 부분에서 종횡무진이다. 전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색이 중세의 색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옛 사람들이 인식하는 색을, 그리고 기술하고 있는 색을 지금 그 색으로 인식한다는 보장이 없다(그래서 색의 역사를 다루는 것은 어렵다). 그런 관점에서 몇 가지 색의 상징사를 다루고 있다. 흑백이 중세 교회를 거쳐 종교 개혁 시기 색의 파괴에 따라 부르주아적 가치를 지닌 색이 된 역사, 염색업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이는 당시 색이라는 것을 어떻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붉은 색이 어떤 과정을 거쳐 불길함과 배신을 상징하게 되었는지(특히 유다의 붉은 머리)를 다룬다.


미셰 파스투로의 초기 이력은 문장과 인장 연구다. 그래서 중세 이후 등장했던 문장과 인장에 대해서도 얕지 않게 다루고 있다. 문장(紋章)이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에서 점차 가문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나아가 깃발을 통해서 국민과 국가를 상징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그런 면에서 우리는 중세의 전통 위에 서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는 체스와 아서왕 놀이와 같은 놀이에 대해서, 중세 상징들이 후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를 라퐁텐의 동물지(라퐁텐은 최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양이》를 통해서 알게 된 인물이기도 하다), 중세 이미지에 대한 기록을 남긴 네르반, 18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아이반호》를 통해 들여다보고 있다. 이 마지막 부분은 언뜻 앞의 다룬 소재와는 다른 결을 지니고, 또 주제에서도 조금 멀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책 앞부분의 20개의 도판에도 이 부분에 대한 것들은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 저자도 이 부분이 다소 이질적인 것이라고 인정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원래 2003년에 출판되었다. 다른 책들의 출판 연도를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이 책은 그의 상징적 동물에 대한 연구, 색에 대한 연구를 종합하는 책이라기보다는 그런 연구의 바탕이 되는 책이 아닌가 싶다. 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하는 게, 미셸 파스투로는 이 책에서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또한 다른 전문 연구자들의 분발을 촉구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결론이라기보다는 개론이자 서론, 연구 제안 같은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니 그래서 내가 이 책 곳곳에 붙여 놓은 띠지를 보고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질문으로서 가치가 있고, 또 생각의 단초로서 가치가 있다. 물론 재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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