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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Jul 28. 2021

리스본에서 빈까지 여행한 코끼리가 있었다

주제 사라마구, 《코끼리의 여행》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을 읽기 위해 책을 펴들면서는 긴 호흡을 하고 긴장을 해야 한다. 수 페이지에 걸쳐 문단을 나누지 않고, 대화와 지문을, 그리고 상황 설명과 저자의 생각을 구분하지 않는 방식 때문에 그렇다. 수십 페이지를 읽다보면 이제 익숙해지지만, 결국 어느 부분에 가서는 다시 쩔쩔매기도 한다. 《코끼리의 여행》은 리스본에서 빈까지 여행한 코끼리 이야기라는 간략한 설명 때문인지 그나마 덜 긴장한 채로 시작할 수 있다. 그래도 주제 사라마구이니 그냥 코끼리가 아닐 것이고, 그냥 여행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좀 낫지 않겠는가?


16세기 포르투갈의 동 주앙 3세가 스페인 섭정으로 바야돌리드에 와 있는 사촌인 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안에게 코끼리를 선물하기로 마음먹는다. 인도로부터 어떻게 들여왔는지 모를 코끼리가 당시에는 꽤나 신기한 동물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솔로몬, 혹은 술래이만이라 불리는 코끼리는 리스본에서 바야돌리드로, 제네바로, 알프스 산맥을 넘고, 오스트리아의 빈까지 이르는 대장정에 돌입하게 된다(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그 길에서 겪는 사건과 만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이 소설을 이룬다.


당연히 당시 세태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풍자다. 코끼리 솔로몬과 그 솔로몬을 보살피는 마호우트 수브흐로(혹은 프리츠)의 눈에 비친 세상은 지금의 세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별 것 아닌 것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거짓 기적으로 사람들을 기만한다. 코끼리와 수브흐로는 그런 광경들에 저항하지도 않고, 순응해가며 그 먼 길을 함께 한다.


코끼리가 주인공이자, 또 풍자라고 했지만 그다지 무겁지는 않다. 가톨릭 구교와 프로테스탄트의 갈등도 첨예하지만 격렬하게 충돌하지 않는다. 아마도 인생의 황혼기에 이른 대가가 세상에 대해 가지게 된, 좀 모가 깎여진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이 작품은 주제 사라마구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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