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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Aug 24. 2021

진화는 평범함에 대해 관용적이다

다니엘 S. 밀로, 《굿 이너프》


다윈의 자연선택설에 대한 반론, 혹은 보완이론을 내세우는 이론은 적지 않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스티브 제이 굴드와 닐스 엘드리지의 단속평형설이라든가, 여러 진화론자들이 주장한 협력이론 같은 것들이 있다. 창조론자, 혹은 지적설계론자들은 이런 이론들이 제기되는 것을 (다윈의 이론이 아니라) 진화론 자체의 문제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이론들도 사실은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진화를 보다 더 정확하고 폭넓게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이론을 내세우는 것이란 점을 분명히 한다. 1930년대 이론 진화론은 유전학과의 결합을 통해 종합설(Modern synthesis), 혹은 신다윈주의(neo-Darwinism)이 주류가 되었고, 1980년대 이후에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에드워드 O. 윌슨의 ‘사회생물학’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지만(그게 진화학의 주류가 되었다고는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없을 것 같다), 여전히 이에 대한 추가 이론과 보완, 반론들이 이어지는 것은 진화학, 혹은 진화론이 학문으로서 건강함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다니엘 밀로의 ‘굿 이너프’ 이론도 그런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포섭하지 못하는 자연의 진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볼 수 있다. ‘굿 이너프(good enough)’는 ‘충분히 훌륭한’이란 뜻으로, 자연선택에서 얘기하는 최적자(the fittest)에 대한 선택보다는 진화는 넓은 범위의 다양성을 용인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자연이라는 힘은 어떤 것을 선택한다기보다는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것만을 도태시킨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서 저자는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보다는 자연도태(natural elimination)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요새는 natural selection을 자연선택이라고 번역하지만 오랫동안 자연도태라고 번역했었다. 아마도 일본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그때의 자연도태는 여전히 natural selection이고, 번역한 이충호 씨는 이와에 있었던 용어를 가져다 쓴 것 같은데, 밀로가 주장하는 것은 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밀로는 우선 다윈의 자연선택이 불충분한 설명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상징적으로, 진화 내지는 자연선택의 상징, 즉, 진화의 아이콘에 대한 분석과 비판에 나선다. 진화의 아이콘이란 기린, 비둘기와 개 등의 가축화의 비유, 갈라파고스 제도의 핀치, 그리고 인간의 뇌다. 자연선택은 모든 생물 현상에 적용되는 것인 만큼 무엇을 예로 들어도 될 것이나 밀로는 가장 강력하고도 대중적인 설명에서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를 파고들고 있다. 기린의 긴 목에 대한 라마르크의 설명(용불용설)을 비판한 다윈(주의자)의 설명 역시 잘못된 것이라고 하고 있으며(이는 논리적인 설명이기도 하고, 또 최근의 연구 결과이기도 하다), 갈라파고스 제도의 핀치에 대해서는 그것이 진화의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점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 인간의 뇌에 관해서도, 뇌가 커짐으로써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는 설명을 부정하고 있다. 오히려 인간의 큰 뇌는 생존을 위해서도 커다란 장애물이라는 점에서 그것이 자연선택의 결과라는 기존의 설명은 잘못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굿 이너프 이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굿 이너프 이론은 ‘중성(neutrality)’에 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유전자에 대한 기무로 모투의 이론(유전자에서 대부분의 변이는 이롭지도, 해롭지도 않은 중성적인 것이다)에서 나아가 표현형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변이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연선택의 재료, 대상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변이 자체가 생존에 별 문제가 없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 넓은 변이는 ‘과잉’ 상태를 낳게 되는데, 과잉이 나쁘고, 그것들은 제거되어야 한다는 합리주의적 견해를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다.


3부는 인간에 대한 내용이다. 이 부분은 조금 이질적이란 느낌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는 인간(특히 뇌)의 진화를 다른 생물이나 기관의 진화와 달리 생각하면 안 된다는 투였는데, 여기서는 인간의 특수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인간은 어느 시점 이후 다른 동물과는 다른 진화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밀로는 다른 이들은 거의 얘기하지 않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자신은 설명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미래’를 생각할 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다니엘 밀로의 책을 이미 접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래중독자》. 그러니까 이 책의 3부는 이전 책에서 했던 주장의 요약이며, 조금 더 나아갔다면 ‘진화윤리학’의 비판인 셈이다. 인간에게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미래중독자》를 읽으며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도 그 부분은 여전히 긍정적이지만, 그 이후에 전개되는 얘기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이를테면 우리의 탁월함에 대한 욕구는 심심함에 대한 반응이라든가, 탁월성을 요구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든가 하는 것들).


이런 내용을 쓰면서 다니엘 밀로는 걱정이 되기는 했나 보다. 자신의 이론이 다윈과 맞서는 것으로 읽히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에, 여러 차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대신에 자신의 이론이 그저 다윈의 이론에 대해 보완 정도가 아니라 거의 비슷한 정도로, 대등하게 취급받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에는 그의 이론은 독창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며(사실 그의 예들도 처음 접하는 것이 아니다), 논리가 아주 정합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다만 평범성에 대한 옹호, 그리고 진화를 최적자에 대한 선택이 아닌 상대적인 적합성에 대한 선택, 내지는 도태로 보는 관점을 아주 흥미롭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진화에 대한 ‘조금’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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