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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Aug 25. 2021

백조와 박쥐는 서로가 서로를 잉태한다

히가시노 게이고, 《백조와 박쥐》


백조와 박쥐. 이 극명하게 상반된 인상을 가진 두 동물을 제목으로 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소설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암시한다. 백조와 박쥐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바로 에셔의 그림이다.

공간을 기묘하게 해석하여 불가능한 공간을 2차원의 평면에 묘사했던 에셔는 위의 그림에서는 날아가는 하얀 새와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검은 새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한쪽이 백조라면, 다른 쪽은 박쥐인 셈인데, 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잉태하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소설이 그렇다. 1984년의 사건이 2017년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설정은 그가 즐겨 사용해온 방식이다. 과거에 해결되지 않은 사건, 혹은 그 업보가 현재로 이어져 더 큰 비극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이 해결된 것처럼 보이다가 약간의 의구심이 점점 커지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전혀 상상하지 않았던 새로운 결과로 끝나는 것도 히가시노 게이고가 여러 차례 사용해온 방식이다. 100쪽 남짓에서 범인이 잡혔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사건에 뭔가가 더 있음을 짐작케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것을 감추지 않으며 사건의 이면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를 함께 찾아보자고 한다.


사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비난받을 수도 있으며, 동시에 동정심의 대상도 될 수 있다. 대학생 시절 사기당한 할머니를 대신해 항의하다 살인을 저지른 변호사는 그 사건 자체로는 비난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이후의 행보를 보면 비난의 목소리가 사그라든다. 살인을 대신 자백한 구라키의 경우엔 그의 행동이 인도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고개를 숙이게 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봐서는 살인자를 두 번씩이나 은폐한 셈이다. 그런 행위가 감성적으로는 옹호할 수 있지만, 조금만 정신 차리고 이성의 영역으로 돌아오면 과연 옹호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될 수 있는 지점이다. 살인자로 잘못 몰려 자살한 가장의 딸로서 자란 이의 입장에선 또 어떨까? 자신의 아들이 실제 범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 또 가해자의 아들과 피해자의 딸이 사건의 진실을 파고들고자 할 때 그 행동을 극구 말리는 변호사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비난만 할 수는 없다. 그들도 사법 체계 내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재판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니 말이다. 물론 소설을 읽으면서도 답답하지만 말이다.


가해자의 아들은 정상의 생활로 돌아온다. 피해자의 딸은, (현상적으로는 여전히 피해자의 딸이지만) 결론적으로는 가해자의 딸이 된다.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뒤엉킨 관계에서 그것을 따지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에셔의 그림에서와 같이 그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잉태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35주년 작품이라고 한다(2016년의 《라플라스의 마녀》가 30주년 작품이라고 했으니 계산상으로도 맞다). 97번째의 작품. 많이 썼다. 그 작품들 가운데는 아주 수준 높은 작품도 있지만, 가끔 범작(凡作)도 눈에 띤다. 이 소설은 따지자면, 꽤 괜찮은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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