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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 Sep 11. 2021

망겔, 삶과 사회를 비춰준 문학친구들을 소개하다

알베르토 망겔, 《끝내주는 괴물들》


내가 알베르토 망겔(또는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자라는 명백하다. 그의 《책읽는 사람들》, 《은유가 된 독자》, 《독서의 역사》, 《밤의 도서관》, 《서재를 떠나보내며》를 읽었고, 지금 막 《끝내주는 괴물들》까지 읽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의 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할 수 없다면 어째서 그런 것일까? 독자와 팬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그의 책을 읽는 것을 즐기지만, 열광하지 못한다. 망겔을 너무나 당연한 듯 언급하는데 나는 읽지 못한(사실은 읽지 않은) 책과 저자, 등장인물 들이 나오면 흐름이 끊기고 집중하지 못한다. 열렬함에 빠지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망겔의 독자이지 팬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최고 독서가의 독자다. 그의 글은 책과 글에 대해 쓰지만, 분명하게 현실을 겨냥한다. 책이라는, 어쩌면 현실에서 벗어난 것에 매몰되어 있는 것 같지만, 그의 책에 대한 글은 끈질기게 현실에 대해 발언한다. 교묘하지만 누구라도 느낄 수 있다(<요나>나 <신드바드> 같은 글을 읽고 그리 생각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책은, 특히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 소설을 읽고, 책을 읽는다. 최소한 망겔의 독서는 그렇다.


《끝내주는 괴물들》에서 망겔은 37명(?)의 소설 속 등장인물을 불러낸다. 내가 망겔의 팬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얘기했는데, 여기서 그런 소심한 좌절감은 사라지기도 하고, 혹은 더 심각해지기도 한다. 그 까닭은 그가 언급하는 작품들이 그래도 좀 아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고, 그런데도 그가 언급하는 인물들은 오히려 낯설 인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귀스타브의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서 망겔을 보바리 부인이 아니라 그의 무색무취한 보바리 씨를 불러낸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는 거트루드를 불러내고,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는 피비를 불러낸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는 짐을,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서는 퀴퀘그를, 오승은의 《서유기》에서는 사오정을 이야기한다. 물론 《드라큘라》의 드라큘라, 괴테의 《파우스트》의 파우스트,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로빈슨 크루소,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의 카지모도,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의 에밀, 쥘 베른의 《해저 2만리》의 네모 선장 등과 같이 중심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지만(아! 김만중의 《구운몽》의 주인공 성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놀랍지 않은가!), 그가 남들이 애정을 덜 주는 인물들에 시선을 많이 돌리고 있다는 것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보통의 사람들이 읽는 것 이면의 느낌들을 찾아내고 공감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 이를테면 가장 강력한 인물인 슈퍼맨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슈퍼맨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물론 초능력이 친근했던 건 아니지만, 원치 않게 고립됐던 그의 신세와 소외감에 공감했다. ... 소심한 신문 기자와 막강한 영웅 사이를 오가며 이중생활을 해나가는 슈퍼맨을, 좀처럼 자신감이라곤 없고 죄스럽게 느껴지는 문학적 열정에 휩싸여 있었던 청소년 시절의 나 자신과 닮은 데가 많았다.” (77쪽)

그가 주인공뿐만 아니라 조금은 덜 주목받는 인물에도 공감한 이유가 짐작 간다.


이렇게 그가 다루는 인물들을 보면 이 책의 제목이 “괴물들”(원제도 《Fabulous Monsters》다)이라는 것을 선뜻 납득이 가지 않을 수 있다. 괴물이라는 범주를 인정할 만한 것들이라고 해봐야 드라큘라라든가, 파우스트, 카마이라, 사탄 정도뿐인데 말이다(괴물에 대해서는 호메로스의 키마이라에 대해 쓰며 한번 언급한다. “괴물들은 우리가 존재하기를 원하기에 비로소 존재한다. 아마도 그들의 존재가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리라.”(143쪽)며 괴물들을 불러내는 것은 우리라고 지적한다. 괴물에 대한 책임감은 외면서 말이다.)

그런데 다 읽고서야 깨달았다. 이 책 제목에서 방점은 ‘괴물들’에 찍혀 있는 게 아니라 ‘끝내주는’에 찍혀 있다는 것을 말이다. 망겔을 자신의 인생과 함께 해준 문학 친구들을 불러내고 있고, 그들과 함께 한 삶이 끝내준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의 삶을 그렇게 어지럽혀준 ‘괴물’은 애칭인 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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