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A Sep 27. 2021

'인간'적인 학명의 세계

스티븐 허드, 《생물의 이름에는 이야기가 있다》


린네의 이명법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대단한 의식의 전환이었다. 생물의 학명을 정하는 데 그 생물의 모양이나 기능과 같은 특성과는 상관 없이 명명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명명 체계를 간결화했고, 영속화시켰다. 학명 자체로는 그 생물의 특성을 짐작할 수 없을지언정 누구에게도 통하는 기호가 되었기에 학자들에게는 공통 언어가 생긴 셈이었다. 진화를 부정했다든지, 좀 엉큼한 구석이 있었다든지 하는 린네에 대한 비판이 어떠하든지간에 이 혁명적 발상에는 아낌없는 평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린네에 의해 명명 체계가 정립된(생각해보면 린네 이후에 그토록 신속하게 린네의 시스템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생물의 학명은 다분히 엄격한 기준 아래 정해지고 받아들여지고, 혹은 기각되기도 한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각 분류군마다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란, 거의 법률집 같은 규약집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선취권(priority)로서 가장 먼저 기술하고 발표했을 때 그 학명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명확하게 기술되어야 한다든지, 라틴어의 어미를 붙여야 한다는지 하는 것 정도가 일반인들도 기억해야 할 내용이다.


학명을 정할 때는 다양한 이름에서 가져온다. 생물의 특성을 나타내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국가나, 도시, 강, 산 등의 지역 이름을 따기도 하고, 어떤 기관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학명을 지을 때 흔한 것 중의 하나이면서 가장 흥미로운 방법은 바로 사람의 이름을 빌어 짓는 것이다. 곤충학자 스티븐 허드가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이름에서 온 생물의 이름이다.


사실 이 내용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분류학이란 누가 보더라도 따분한 학문이며, 상당히 정형화되어 있다(또한 안타깝지만 많은 연구비 지원을 기대하지 못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무리 사람 이름을 학명에 붙이는 것에 사연이 많을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다양한 사연이 있고, 또 그것을 이렇게 재미있게 풀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생물의 학명에 사람 이름을 붙이는 경우에는 당연히 존경하는 과학자(이를테면 다윈과 같은 경우. 다윈의 이름은 학명에 가장 많이 들어간 케이스다)가 있다. 이 경우에는 이미 죽은 과학자도 있지만, 현재 활동하고 있는 과학자의 이름도 포함된다. 아무리 보잘 것 없게 생긴 생물에라도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학명에 붙였다면 거의 대부분은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가족의 이름도 있을 것이다. 아내의 이름(남편의 이름은 예상대로 드물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딸의 이름(역시 아들의 이름은 적은 것 같다), 부모의 이름 등인데, 당연히 정부(情夫)의 이름도 포함된다(이런 모험을 저지르는 과학자들이 있다). 그리고 스티븐 허드는 원수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보여주고 있다. 대체로는 아주 흉측한 생물체에 붙이는 경우인데, 나는 그런 경우에도 그 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기도 할 것 같다. 사람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소설 속 인물, 만화나 영화 속의 인물의 이름을 학명에 붙이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이를테면 해리포터 시리즈의 인물들이라든가), 학명에 사람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어쩌면 분류학에서 가장 창의적인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또한 엄숙한 순간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불문율 같은 것이 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다. 명명 규약에서 명명자 자신의 이름을 금한다는 조항은 없다. 하지만 과학자 사회는 이 사안에 대해서 대체로 엄격하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학명에 붙였으면 비난과 왕따가 뒤따를 게 뻔하고, 대체로는 학술지에서 정중히 변경시켜 줄 것은 요청할 것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의 이름을 붙이거나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은 것 외에 논란이 되는 경우는 학명을 두고 경매를 하는 것이다. 가장 비싼 값에 팔린 이름은 Callicebus aureipalatii라고 하는 원숭이 종류인데, 여기서 ‘aureipalatii’는 ‘황금색 궁전’이라는 뜻으로 온라인 카지노어체인 GoldenPalace.com이 65만 달러에 판매되었다고 한다. 그밖에도 소소한(?) 금액에 경매되는 학명들이 있다고 하는데, 대체로는 환경 보전 사업에 사용된다. 분류학자 중에는 어떤 순결주의 같은 것을 경향이 짙어서 이런 경우 상업주의라며 비판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텐데, 저자인 스티븐 허드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연구비가 없는 이 분야에 이 돈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시각이다. 어쨌든 불려져야 할 이름이며, 그 이름을 통해 발견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도, 이러한 작업에 대한 후원자를 구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보는 것이다. 명명 규약에서 이러한 일을 금하지도 않으니.


나도 생물의 학명을 지은 경우가 몇 번 있다. 이 책에서는 주로 곤충을 비롯한 동물과 식물 등에 한정해서 이야기했지만, 내가 지은 학명은 모두 세균의 것이다(세균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다). Legionella busanensis라고 부산이라는 분리 장소의 이름을 딴 것도 있고, Bordetella ansorpii라고 내가 관여하던 조직의 이름을 딴 것도 있다. 어린 아이의 몸에서 나온 세균에는 Bacillus infantis라는 학명을 붙이기도 했고, Microbacterium pyrexiae 같은 이름은 열이 나는 환자에서 분리했다고 사전을 열심히 뒤져 찾아낸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과 걸맞는 것도 있다. 바로 Acinetobacter kookii인데, 바로 내가 박사후과정 때의 지도교수의 성이 ‘국’씨였다.

작가의 이전글 고전 문학에서 삶의 태도를 배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