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헤어 • 버네스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내가 ‘자기 가축화(self-domestication)라는 개념을 처음 접한 것은 윌 스토의 《이야기의 탄생》이었다. 이야기라는 도구가 다른 이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또한 문명의 탄생에 이바지했다는 내용의 책이었고, 거기서 다른 이(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특징을 인간이 갖게 된 것을 바로 ’자기 가축화‘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가축들은 인간에 적응하면서 가지게 되는 특징, 즉 펄럭이는 귀, 얼룩무늬의 털, 말려 올라간 꼬리 등을 보인다(그 많은 포유류 가운데 가축화가된 동물은 겨우 14개뿐이다.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특징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종의 가축들에게 친화력의 증가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가축들의 특징이 인간의 진화에서도 엿볼 수 있으며, 인간은 스스로 가축화의 특징을 걸어왔다는 것이 랭엄 등이 주장한 ’자기 가축화‘ 가설이다.
’자기 가축화‘ 가설은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의 성공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등장했을 무렵, 그들(우리?)보다 훨씬 뇌의 크기도 크고 튼튼해보이는 인간 종(species)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살아남은 것은 호모 사피엔스뿐이었고, (논란은 있지만) 지구 곳곳에 그 자손을 퍼뜨리는 데 성공한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자기 가축화‘ 가설은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호모 종들과 달랐던 점은 바로 그런 점, 즉 공감의 능력, 동족을 보살피는 능력, 나아가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 등 겉보기에 강인함과는 반대되는 특징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하얀 공막을 가져 눈동자의 움직임을 감출 수 없는 유일한 종, 그래서 눈을 맞추면서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또 상대를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하는 종, 바로 호모 사피엔스는 바로 그런 특징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그런 특징을 진화시키지 못한 다른 인간 종(네안데르탈인 등)은 호모 사피엔스와는 다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바로 그 자기 가축화를 표상하는 말로, 랭엄의 제자인 브라이언 헤어가 골라낸 말은 ’friendiest’이다. 이 책에서 다정함 또는 친밀한 등으로 번역하고 있는 이 낱말은 자기 가축화가 나은 인간의 특징(나아가 보노보와 개의 특징이기도 하다)이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개와 늑대의 운명의 비교다. 개는 유전적으로 늑대와 같은 종(species)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상태는 매우 다르다. 개은 인간에게 가장 친숙하면서, 거의 가족에 버금가는 존재로서 번성하고 있지만, 늑대는 멸종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그런 상반되는 운명은 무엇 때문일까? 다름 아닌 개가 개로 진화해온 특징, 즉 인간에게 친밀해지기 위해서 발달시킨 여러 유아적 특징 때문이다(브라이언 헤어는 인간이 개를 길들인 게 아니라 개가 스스로 길들여진 것이라 본다).
하지만 친화력이 긍정적인 결과만 낳지는 않는다. 친화력의 증가를 낳은 신경호르몬의 변화는 같은 집단 구성원에게는 긍정적으로 작용할지 모르지만, 외부인은 오히려 비인간화하는 경향을 증가시킨다. 역사를 보더라도, 현재의 인간 사회를 보더라도 모든 집단 수준에서 타(他)집단의 구성원을 향한 적대감, 나아가 폭력성은 거의 필연적일 만큼 나타난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라이벌 팀을 향한 야유는 아마 가장 온순한 형태로 나타나는 자기 가축화의 부산물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조금만 격화되면 폭력적으로 변하고, 국가 간의 전쟁으로까지 나타난다.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인종 차별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 속에 있을 지도 모르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비하도 그렇다. 자기 가축화로 인한 다정함, 친화력은 인간이 성공의 길로 접어들게 한 것은 분명하지만, 또 스티븐 핑커가 지적한 대로 점점 평화적인 종족이 되어온 것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지만, 그 부작용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감사의 말에서 이 책을 다 쓰고도 2년 동안 다시 고쳐 썼다고 했다. 바로 트럼프의 당선 때문이었다. 증오의 말로 지지자들을 자극하여 대통령에 당선되는 현상을 보면서 아마도 인간성에 대해 회의감마저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 역시 생각해내기 위해 애를 썼다. 그건 바로 접촉이었다. 서로 다른 인종의 사람끼리, 서로 다른 종교의 사람끼리의 접촉은 우리 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그 자질을 다시 일깨운다. 그 사례들이 아주 강력해 보이지는 않지만(실험 등에 의한 것도 아니고, 단지 일화적인 성격을 띤다), 그런 접촉을 통해 협력과 소통이 아니라면 다른 것도 없지 않나 싶다. 우리가 생존해오고, 또 번성해온 그 진화적 특징을 온전히 긍정적으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더욱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