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 《질문하는 역사》
20년 전의 글이지만 낡아 보이지 않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역사에 대한 질문 자체가 보편성을 띠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2부의 <문학 속의 역사>의 글 꼭지들은 문학, 그것도 꽤나 오래된 문학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그 문학 작품들로부터 거리를 생각하면 20년은 별로 멀지 않으니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1부의 <역사의 발언은>은 역사를 통한 질문들을 통해 당시 ‘현재’에 대한 발언을 했다는 걸 생각하면, 그 ‘현재’의 상황과 의미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역사학자로서 주경철 교수는 역사를 읽고, 연구하면서 들었던 여러 질문들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강대국이 아닌 작은 나라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묻고 있으며, 왜 권력, 특히 독재 정치가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교육해 왔는지를 묻고 있다. <돈키호테>에서 적나라하게 그려진 당시 유럽, 특히 스페인 사회의 모습이 21세기에 들어서도 우화적으로 그린다면 그리 달라지지 않은 이유를 찾고 있다. 전염병(페스트) 시대의 종교의 역할에 대한 질문은 20년 전의 상황보다 지금 더 적절한 질문이 되고 있다. 근대사가 과연 진보의 역사인지에 대한 회의감을 이야기하고, 나치의 만행을, 고통스럽지만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영화 <쇼아>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20년 전 처음 책을 펴낼 때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처음 사회나 대학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에게 가닿았으면 한다“고 했지만, 과연 사회에 진출한 지 오래된 성인들이라고 해서 이런 질문들이 필요 없을까 싶다.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은 아닌가? 주경철 교수는 이미 물들 대로 물들어버렸거나, 이제 질문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세대에 대한 희망을 거두고 그래도 조금이라도 희망을 걸 수 있는 세대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혹 그랬다면 20년이 지난 지금 그가 희망을 품었던 그 세대는 이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과연 이 질문들을 품고 살 여유가 있었을까? 이 비슷한 질문들을 받아 들었을 때 어떤 대답들을 하고, 또 다른 질문들을 던질 수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 나라, 이 사회는 조금 더 희망적이 되지 않았을까?
이 사회는 여전히 많은 질문이 필요하다. 비록 허공에 떠도는 소리가 될지언정 한 사람이라도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그 질문은 의미가 있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