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는 범죄자와 구분되어야 하는가?

오쿠다 히데오, 《죄의 궤적 1, 2》

by 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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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대한 판단이 행동의 최종 결과에 대한 것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런 행동을 가져오게 한 조건을 고려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묻고 있다. 오쿠다 히데오는 답을 내리지 않는다. 이에 대한 답은 개개인이 스스로 내려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의 판단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일관적이지도 않다.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는 행동의 최종 결과를 두고 단죄해야 한다고 소리 높이다가도, 죄를 지은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 지경까지 가게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동정론을 펼치기도 하고, 무정한 사회를 비판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 옳다고 할 수 없다.


작가는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1963년의 일본을 뒤졌을 수도, 아니면 1963년의 일본을 탐구하다 이 질문이 나왔을 수도 있다. 이 질문이 낯선 것도 아니다. 많은 소설들이 이 질문을 던지며, 문학 작품이 아니더라도 사실은 매일매일의 많은 기사들이 이 질문의 기조 아래에 있다. 그 기사와 소설이 어떤 기조에 서 있든 그것을 읽는 이는 그런 질문을 받고 있다.


그래서 생각해 봤다. 보편적인 답이 아니라 오로지 이 경우, 우노 간지에 대해서만 말이다. 그는 상습적인 빈집 털이를 저지르다, 결국엔 우발적으로 여섯 살 아이를 유괴하고 살해하였고, 또 자신과 정을 통하던 여성도 목졸라 죽였다. 기억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서는 의식이 나가버려 자신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바보’라는 놀림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그러다 그런 자신의 인생이 어린 시절의 계부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 것을 깨닫고, 그 계부를 죽여야만 억울함이 풀릴 것 같아 도주하다 끝내 잡히고 만다.


그의 어린 시절은 안타깝다 못해 참혹하다. 그 때문에 그가 겨우 스무 살에 그런 ‘죄의 궤적’을 남기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과연 그는 자신의 범죄를 의식하지 못했을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 그가 집요한 추궁 끝에 자백하는 과정은 오히려 그가 너무도 정교하게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가 자신의 잘못된 인생이 계부 때문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지만,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사실이겠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지 않겠다고 작정한 것은 아닐까?


어떤 끔찍한 범죄가 벌어지면 사후적으로 그 행위의 근원을 찾는다면 전문가들이 등장한다. 의미 있는 얘기이겠지만, 가만 듣다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조금 전문적인 용어를 섞고 있을 뿐, 나중에야 누구든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그 범죄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그 잔혹함, 참혹함, 비겁함을 비판하는 것이 솔직하고, 나아보일 때가 많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유유하게 전개되다 급격하게 몰아치고, 또 숨을 돌리는가 싶다가 다시 긴급해지는 전개는 작가가 이 소설을 얼마나 정교하게 구상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공을 들여 묘사하고 서술했는지 보여준다. 더불어 1960년대의 일본 사회를 엿볼 수 있고, 재일조선인이 주요 인물 중 하나라 그들의 일본 사회에서의 위치까지도 짐작할 수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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